서랍에서 새어나온 30년 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벚꽃은 눈발처럼 하늘 가득 흩날리고 이제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버렸다. 올 한 해의 계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벌써 삼분의 일이 지나버렸다.
딸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건강한 자아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려 한다. 남편과 나는 딸의 독립적인 꿈을 꾸고 꿈을 키울 공간을 마련해줘야겠다 생각했다. 집 안 공간을 재배치하기로 했고, 가장 먼저 책장을 비워야 했다. 책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 자꾸만 손이 멈췄다.
책장에는 남편과 내 전공 서적이 빼곡했다. 몇 번이나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한때는 밤을 새워 붙들고 있던 책들. 이 책이 없으면 불안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몇 년째 펼쳐보기는 커녕 꺼내보지도 않았다. 임용 고시와 지금 내 삶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니까. 그래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과 노력을 정리해 버리는 것 같아서.
욕심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도 많았다. 언젠가 꼭 읽겠다며 다짐했지만, 그 '언젠가'를 만나지 못한 책들. 그래도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곧 펼쳐볼 날이 올 거라고. 책이란 건 사두고 마음이 갈 때 꺼내보는 것이니까.
오래된 책들을 비우고 나니, 이 사랑스러운 작은 인간의 세계가 될 새로운 책들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아이의 책을 꽂으며 생각했다. 이 책들은 그녀의 삶을 어떻게 물들일까?
서랍을 열자 더 오래된 과거가 새어 나왔다. 어릴 적 숨 가쁘게 모았던 문구들, 별보다 반짝이던 스티커들,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둔 편지지들. 너무 갖고 싶어 용돈을 모아 하나하나 사 모았지만, 너무 소중해 감히 쓰지 못했던 것들. 이제는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찢겨 보잘것없는 조각이 되어있다. 한때는 내 세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들이 이제는 의미 없는 흔적만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물건들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선명하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두근거림, 친구들과 나눴던 웃음, 그날의 햇살과 바람까지. 결국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이었다.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한때 소중히 여겼던 것들의 총합이니까.
딸이 슬그머니 내 옆에 와 서랍을 들여다본다. 작은 것들 하나하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쓰다듬는다. 책상 위에는 그녀의 보물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이돌 포토카드, 스티커, 키링들. 조심스레 만지고, 정리하고, 아까워서 실제로 쓰진 않는다. 거울로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어른들 눈에는 사소해 보이는 이 작은 것들. 나조차도 가끔은 ‘이게 뭐라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딸의 우주를 채우는 빛이다. 나는 그 빛을 존중해주려 한다. 과하지 않게, 그 감정의 소중함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딸이 자라는 과정은 나 또한 엄마로 성장하는 여정이다. 서툴고, 낯설고, 때로는 버겁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자란다. 언젠가 이 모든 순간을 미소 지으며 돌아볼 날이 올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들을 조용히 변화시킨다.
한때 나의 세계 전부였던 것들이 이제는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다. 나이를 먹으며 내 감성의 색조가 서서히 변해 버렸나. 어릴 때 보지 못했던 세상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 시절 소중했던 것들은 이제 애틋한 그리움의 흔적으로만 뿌옇게 느껴진다.
딸은 다이소에서 산 포토카드 바인더에 새 카드를 정성스레 넣으며 행복해 한다. 그 중 한 장을 특별히 골라 책상 한쪽에 예쁘게도 붙인다. 나는 그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본다.
딸의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과,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될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마치 내 어린 시절의 보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딸의 작은 보물들도 미래의 그녀를 빚어내는 소중한 조각들이 될 것이다.
지금의 내게는 소중해서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또 언젠가는 빛이 바라고 느낌만 남겠지. 너무 연연하지도 너무 조바심내지도 않아야지. 순간의 감정들만은 내 안에 영원히 살아있을 거니까.
길은 잃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그 길 위에는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빛바랜 채 남아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분명 아름다웠다.
TV 속 연예인보다 옆집 잘생긴 오빠에 더 관심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 다시 활동하는 젝스키스, GOD, 2NE1, 베이비복스를 보면 새삼 설렌다. 그런데 그 멤버들이 이제는 부모가 되어 예능에 나오고, 그들의 노래는 '추억의 명곡'으로 불린다.
바쁘게 일하고, 또 아이들을 키워내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 그때의 설렘이 떠오를 때면 조용히 미소 짓게 된다.
시간은 흘러도 반짝임은 남는다. 먼지가 쌓일 뿐. 오늘 밤에는 괜히 그 먼지를 후후 털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