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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Jul 28. 2020

겨울나비. 38 평생 일기

일기 전체를 서울역사 박물관에서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일기는 나의 분신입니다.

국민학교 때 숙제에서, 중학교 때 사춘기에서, 고등학교 대학교의 청춘., 그리고 뒤따라온 중년 장년까지 동행입니다.

국민학생 때는 담임 선생님이 반 아이들 앞에서 내 이름을 불렸습니다. 가장 못 쓴 일기랍니다. 일기를 못 쓴 아이로서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학교 숙제라서 열심히 써야 했지요. 칭찬받은 아이만큼 일기를 쓰려고 애씁니다.

중학생 2학년 때는 어머니께서 사주신 튼실한 일기장에 일기를 썼습니다.

사춘기의 생각, 갈등을 적으면 어머니께서 아들의 침묵이 무엇인가를 아들의 일기장을 슬쩍 보시고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 일기 쓰기의 대장이십니다.

아버지가 쓰신 일기들은 다락방에 가득 찼습니다.

붓글씨로 쓰신 일기장은 엄청납니다.

어느 날, 그 많던 일기장은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당신께서 썼던 일기를 하나 둘 태워버리고는 함께 있었던 아들이 쓴 소년과 청춘 시절 일기까지 태우셨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일기장이 같은 모양이었으니 아버지의 장년 노년과 아들의 소년 청춘은 사라졌습니다.

남은 일기는 대학 3학년 시절부터입니다.

한 신문에 조선 후기의 무관 노상추 어른이 68년간 쓴 일기를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너머북스)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보고는 자신의 일기를 한 번 꺼내서 키를 재보고 일기장을 펼쳐봅니다.

젊은 날에 이제 기억조차 없는 아가씨와 함께 하염없이 오고 간 이야기가 단편 소설입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마음에 그림자조차 없더니 떠난 다음에 만난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 짓궂은 밤을 보내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청춘이 내게 충고를 합니다.

아내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나서 세상은 적당한 괴로움 속에 약간은 적선하듯 있던 행복마저 사라지듯이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어 살아왔던 30년 세월이 고통 속에 가슴이 저몄어도 자라난 내 자식들은 다시 사춘기와 청춘이 지나고 중년이 되어갔습니다.

그동안 우리 부부를 보살펴 주셨던 부모님들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 남은 날이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 세월이 와있습니다.

묵은 일기를 보니 세상일은 마치 소설 하나처럼 결정되어 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만났던 사람과 있었던 일들이 하나같이 결정되어 있었던 같은 느낌입니다.

사랑도 직장도 모두 내 뜻인 것처럼 살아왔으나 묵은 일기를 앞으로 뒤로 넘기다 보면 지도상의 지역을 오가듯이 정해진 길을 간 것 같습니다.

소년 시절에 안네의 일기를 보았습니다.

남이 쓰는 뛰어난 글을 쓰는 솜씨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지낸 이야기를 열심히 써보자는 결심을 합니다.

지난 과거 우리 선대에서 어른들이 자신들이 보낸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웠던 기록이 있던 야담을 좋아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야담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선대의 어르신들이 썼던 글을 보고 싶었습니다.

남들에게 일러주는 의젓한 말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다 털어내는 입말을 듣고 싶었지만 쉽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 땅의 안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네처럼 유태인이 아닌 것이 서운했고 때로는 안네가 소년을 사랑하듯이 나는 소녀를 사랑했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가슴 두근대며 잉크 축인 강철 펜으로 소년은 순정 어린 세월을 적어갔습니다.

일기를 강철 펜으로 쓰고, 만년필로 바뀌고, 타자기로 찍고 워드프로세서 르모로 찍고 컴퓨터 찍고 이제는 휴대폰에 찍고 종이 일기에도 적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 그동안 써 모아서 3m 키나 되는 일기장들은 어쩌면 한순간에 버림을 받아 쓰레기 버리는 날에 종이 더미 속으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쓰기는 참으로 어려웠건만 이 시대에 살았던 어느 한 인생의 일기는 이렇게 혼자 품고 살다가 떠날지도 모릅니다.

일기장 속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한 평생 남편을 믿고 살겠다는 소박한 글을 제 일기에 남깁니다.

결혼 1년 뒤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 아내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평생 불구로 살아갑니다.

나는 아내가 퇴원할 때까지 아내 병상에서 밤을 보냅니다. 함께 머믄 날들을 수첩에 메모하고 나중에 일기장에 붙여놓습니다.

병상 8개월 만에 아내는 퇴원했습니다. 꿈인가 생신인가 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한 지 8개월째 되든 때,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장인어른께서 꽃바구니와 편지 한 통을 보내 주셨습니다. 어른께서는 당신이 돌아가시던 해까지 계속 보내주셨습니다. 가족이 함께 있다는 기쁨은 가족이 웃는 소리만으로 다 보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은 따로 아이들 5년 일기에다 적습니다.

아이들이 쓴 반성문도 일기장에 붙어있습니다. 아빠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겨울 봄여름 그리고 일상은 가을에서 서성이고.

나는 또 일기장에 계절을 적어 갑니다.





꽁지말


1968년~2020년 까지 일기를 씁니다. 일기장이 3미터 높이입니다. 서울 역사 박물관에서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일기와 함께 카메라, 녹음기, 20여년 찍은 비디오 테프, 각종 PDA까지 넘길참입니다. 

막상 가지고 간다하니 뭔가 아쉽습니다. 해서 일기 전량을 내가 날마다 한 권씩 스캔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재 30권 째, 종이 일기와 스캔하여  PDF 로 만든 파일 까지 줄 참입니다. 디지털 시대 사후 세계에서 일기는 영생입니다. 어쩜 착각일 수 있지만... 그냥 집에 두었다가 내가 죽으면 그냥 버려지는 것 보다 낫다 싶기도 해서입니다. 일기 스캔은 하루 4시간 노동입니다. 하다보니 지난 청춘, 세월이 파노라마되어 스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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