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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Jul 05. 2020

겨울나비. 28 속리산 구직 교육

취직 자리 비나이다


살 길 찾자고 속리산 ISO(품질인증) 교육장에 간다.

속리산 관광호텔의 밤 1시가 지났다. 명퇴 후에 먹고 살 길 찾겠다고 불원천리하고 와서 자정까지 눈 껌벅대며 책 보다가 호텔 방에 들어왔다. 룸메이트가 산 맥주 한 캔에 술이 오르고  취기도 빠르다.

호텔 주차장에 들어선 차는 20여 대.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에는 그나마 많은 숫자라던가? 강의료가 백만 원인 ISO(품질인증) 심사원보 교육과정이다. 죽자 사자 하는 사람들이 반 이상이다. 회삿돈으로 교육받는 사람들도 긴장하고 듣고, 제 돈 내고 듣는 사람들은 초긴장이다.

긴장하고 한 장 읽고 다음 장에 가면 앞 장을 잊는 것은 30대요. 한 줄 읽고 다음 줄로 넘어가면 다음 줄을 잃는 것은 40대이며 읽으면서 잊어버리는 50대가 나이는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인적이라고는 함께 교육받는 이들뿐이니 과연 속세를 잊을 만하여 속리산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6시 이른 시간에 속리산 관광호텔에서 버스터미널까지 걸으니 10분 거리이다. 새벽 6시, 너른 차도에는 차 한 대 안 다니니 적막강산.

인도에는 경상도 말씨를 쓰는 여중학생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법주사를 향해 가고 있고 이곳 가게 주인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으나 손은 간 곳 없고 주인만 외롭다.

다리 한쪽에서 손수레에다 뻥 과자와 오징어 파는 아줌마는 새벽에 나선 길손을 보다가 그냥 스치니 실망하고 길손은 공연히 미안하다. 법주사로 이어지고 정상의 샘물에서 발원했을 개울에는 동심의 물이 흐르고 차도에는 차 한 대 없는 새벽길은 얼마 만인가? 산은 높으니 내 가슴도 그만해진다.

작고 조용한 시골이다. 낮에는 제법 사람들이 쉬엄쉬엄 오고 있다.

깨끗이 다듬어진 잔디가 진짜로 융단처럼 깔린 속리산 관광호텔 앞에는 조각 공원이 있다. 구상과 추상이 어울려 있다.

개울에는 그냥 마셔도 좋을 만치 맑은 물이 전설처럼 흐르고 산사에선 타종이 여운을 끌면 여기도 어둠은 도시보다 빨리 온다.

밤은 저기 터미널 불빛으로 미루어 속세가 가까운 듯 아득하구나. 그 길 따라 어제 룸메이트에게 빚진 맥주를 오늘 갚아야 할 모양이다.

속리산 발치에 온 지 이틀 만에야 법주사 경내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교육 시간 7시 전에 다녀오려고 방 친구와 뜻이 맞아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 절 문을 지나 두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길은 적당한 습기가 바람을 일으킨다. 오랜 세월을 살고 살아 기품이 있는 절집은 " 너 참 잘 왔다" 하고 나는 "뵈오니 반갑습니다" 했다.

어쩌다 절에 가보면 불사 증축 먼지가 질펀한데 이곳은 그 철을 보냈는지 기다리는지 조용하니 좋구나 좋아. 하늘을 찌를듯한 청동 부처님께서 산 높이 키로 중생을 굽어보시며 자네 왔으면 인사나 하고 가라신다. 나무 관세음보살하고 합장하는 격식을 모르는 철딱서니는 그 부처님 참 잘생기셨소 하고 버릇없는 생각을 하고 슬슬 피한다.

산에선 황혼 뒤 어둠은 서두르고 범종은 시간을 때리는데 스님들 독경소리가 스미듯이 절 안팎에 낭랑하다. 마당은 썰렁하다. 절 구경은 절 공부를 하고 와야 하건만 마치 도시 아파트 본보기 주택 보듯이 대강대강 보니 법주사를 봤다고 하기도 딱하고 어쭙잖다.

절 마당에 있는 종이며, 탑이며, 번듯한 대웅전이며, 처마 선이며 알수록 다정한 세월 흔적을 건성으로 보니 송구스럽다.

절을 나와 바위에서 솟는 물 한 바가지가 입에 무게를 느끼게 하니 이것은 법주사 부처님께서 주시는 감로수구나. 독경을 끝내고 뿔뿔이 흩어지는 스님들은 이 밤에는 무엇을 하시는가? 이 어려운 시대에 절간에 숨어 사니 천하가 내 세상이구나 하시는가 하고 날면 딱한 생각을 하면서 자꾸 뒤돌아 보니, 하늘은 저기 멀리 보이며 나무 그림자는 양팔로 나를 안았다가 놓았다가 한다.

밤에 내가 복도에서 잤다. 코 골고 이빨 가는 방 친구에게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 새벽 3시에 잠이 언뜻 들었으나 사람들 지나다니는 통로에서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다. 방 친구는 오늘 새벽 3시에 공부를 마치고 들어와서는 곯아떨어져서는 다시 코 골기다.

복도로 나는 나간다. 나보다 앞서서 자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있다. 6시에 다시 나왔을 때는 사람이 바뀌어 있다. 코를 골고 있다. 그는 아마 코를 골아서 방 친구에게 쫓겨났던지, 아니면 저보다 더 강한 방 친구에게 져서 복도로 피난을 왔는지. 정작 내가 갈 곳이 없다. 공용화장실로 갈까 하다고 다시 방에 들어간다. 다행이다. 방 친구가 코 골기가 휴식에 들어가서 조용하다.

낮에 수강생들끼리 코 고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서른 댓 된 방 친구는 코 골기 빼놓고 내게 잘한다.

"황 선생님 황 선생님"하고 자기가 애써 노트한 노트까지 내게 복사해서 준다. 호텔 사무실 아가씨에게 마실 것을 사주고 어렵사리 한 복사였다. 나는 학교도 없고 문방구도 없는 이 시골에서 그 복사를 한 벌 얻으려면 호텔 말고 파출사나 소방서에 가서 할까 하고 참 딱한 궁리를 하는 동안 내 룸메이트는 신통술을 쓰고 해왔다. 나중에 살 술을 오늘 맥주 한 깡통으로 내가 호텔 밖에 나가서 사 와서 고마운 값을 치렀다. 코를 골아도 그가 예뻐진다.

시작 5일 뒤 교육은 오후 5시 반에 끝났다. 다들 열심히 하고 진지하게 한다. 시험공부 대비를 열심히 한 우리 조의 조장은 이번에 시험을 본다. 시험을 다음으로 미룬 내게 조장을 넘긴다. 나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원이라는 수동적 교육태도보다는 조장의 위치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과제를 취합하고 한 번 남보다 더 쓰고 조직을 생각하고 나가서 발표하고 지적받으면서 더 배울 수가 있다.

한 방 친구는 새벽 4시까지 꼬박 버티면서 요약 노트 정리를 다 끝냈다. 나는 그의 노트를 빌려서 호텔 사무실에 가서 복사했다.

그가 해주었던 다음 부분을 하였다. 시험은 교육 끝나는 다음 날에 서울에서 있다. 교육생 19명 중 나를 포함해서 3명만 빠지고 다 본다. 인증 심사원보의 시험은 짝수 월에 있다. 내일 시험을 보려고 남은 수강생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했다.

"시험 꼭 붙어서 다음 시험에 만나지 않도록 하자고요?"

자신만만한 사람이 따로 없으니 다들 자신 없어 한다.

방에서 이미 챙긴 가방을 챙겨 들고 며칠째 묵은 방을 떠난다. 호텔에서 속리산 터미널까지 900미터나 될까? 홀몸으로는 가벼운 산책길이나 티코의 트렁크만 한 가방과 어깨 가방까지 메고 걷는 걸음이 이만저만 힘들지가 않다. 관광객이 없으니 택시가 없다. 있어도 나는 2천 원의 차비를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지나가는 자가용을 있어도 내가 차를 끌고 갈 때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을 태워준 일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어깨가 빠질 듯 힘이 차온다.

마주 보는 위치에서 갑자기 청록색 크레도스가 정지한다.

"타세요."

뜻밖이다. 운전자는 함께 교육을 받았던 수강생이었다. 문방구를 사러 왔다가 나를 보았단다. 그는 이제 40이 안 되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도 자비로 교육을 받았다. 동병상련인가? 속리산을 떠나면서 동료의 정을 받는다.

나는 함께 있던 이들의 정감 어린 눈길을 느끼며 환속한다. 눈에 보이는 꽃은 없어도 마음에는 가득 또 다른 꽃이 담겨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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