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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영 Oct 02. 2023

너는 너 그대로 좋으니까

일본우정(日本郵政)그룹 TV광고 (2023)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라고 소개됐다. 화장을 지운 모습은 그저 곱게 생긴 소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제대로 풀메이크업을 하면 누가 봐도 영락없는 미소녀다. 예쁜 여장남자로도 했다. 여성의 화장에 여성의 옷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했다. 그렇다고, 트랜스젠더이거나 굳이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다. 젠더리스(Genderless). 그냥 젠더에 규정받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고 소개하는 소년의 이름은 이데가미 바쿠(井手上 漠)였다.


출처: https://i-voce.jp/feed/312683 외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17년 제39회 소년의 주장 전국대회였다. 일종의 웅변대회인 이 행사에서 그는 자신의 성적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담은 발표로 전국 2등인 문부과학대신상을 받았다. 스스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혼란을 겪으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이야기, 엄마가 용기를 준 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살아가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의 꿈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발표였다.


이후, 2018년 오디션 프로그램인 쥬논 슈퍼보이 콘테스트에서 약 17,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2명이 오르는 파이널무대에 섰다.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협찬사가 주는 셀프 프로듀스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미용사가 꿈이던 소년이 연예인으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로 연기, TV예능, 광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브랜드도 론칭했다. 

출처: www.instagram.com/baaku_official

2022년에는 스네어 커버와 콜라보프로젝트로 음원을 발표했다. 음원의 제목이 私らしく、僕らしく一井手上漠のことー (나답게, 나답게- 이데가미 바쿠의 이야기)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저 여성처럼 화장하고 옷을 입는 예쁜 남자가 아니다. 성정체성의 이슈로만 소비되는 셀럽이 아니다. 그는 자신다움을 추구하는 아이콘의 하나로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됐다.   


2023년 성인의 날에 맞춰 방영된 일본우정공사의 TV광고 <어른의 맹세> 편은 그의 실제 스토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바닷가의 어느 카페에서 편지를 쓰는 그의 모습에서 영상은 시작된다. 그가 자신이 나온 학교를 돌아보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학창시절을 회상한다. 서정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변함없이 자신을 지지해 준 어머니에게 쓴 감사의 편지가 자막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꿈을 위해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가겠다는 그의 모습 위로 카피한 줄이 정립된다.  


決められた大人にならないことも、
成人だと思う。

정해진 어른이 되지 않는 것도 
성인이라 생각해


동영상 보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완성을, 누군가는 독립을 떠올릴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자유이며 또한 책임감이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광고가 말하는 어른은 의외의 메시지를 전한다. 주인공의 스토리에 딱 맞는 어른의 정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들은 어때야 한다는 규정을 받아들이고, 그런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은 말한다. 어른은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어른이 되면 저렇게 살아야 한다. 어른이 되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감수하고 해내야 한다. 그리고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


그런데, 반드시 그것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이 광고의 카피가 나지막이 위로를 전한다. 정해진 틀을 깨고 자신다움을 지키는 것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을 건네온다. 바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 신념, 정치, 사랑, 취향 등 세상이 결정해 놓은 것들과 자신다움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힘을 준다. 


훌륭한 카피다. 내가 10대나 20대였다면 이 문장이 오랫동안 나의 지표가 됐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 아이의 아빠로서 내 마음에 깊이 박힌 카피는 다른 것이었다.


"스스로의 성별을 몰라서

주변에서 겉도는 존재였죠.

엄마가 불러서 단둘이 얘기했던 그날 

해주신 말 있잖아요.


“바쿠는 바쿠 그대로 좋으니까”


그날 이후, 전 무서운 게 없어졌어요.

엄마가 해준 그 말이 

지금도 저를 지켜주고 있어요."


혼돈과 괴로움 속에 있는 아들을 평생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그 한마디였다.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달려갈 수 있게 한 것은 그 말속에 담긴 믿음과 사랑이었다. 


私は世界一幸せな息子です。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들입니다. 


이 광고를 본 후 오랫동안 이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부모인가.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지켜줘 왔을까. 내 아이는 나로 인해 행복한 걸까. ‘아이가 있는 그대로를 소중하게 대해주고 믿어줬는가’라는 질문에 떳떳할 수 없는 기억들이 자꾸 떠올랐다. 정해진 어른이 되지 않는 것도 어른이 되는 방법이라는 말에 극공감하면서도, 그 기준을 내 아이에게도 똑같이 적용해 줬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머지않아 성인이 된다. ‘키운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충분히 잘 해내지 못한 부모역할을 조금이라도 잘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괜한 아쉬움과 후회가 든다. 그런데, 자녀를 더 오래 키운 선배들이 위로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해준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녀를 챙겨야 할 일과 시간이 너무 많으니 그런 생각 말라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다행인 거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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