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xt 인쇄광고(2021)
20세기 대한민국 광고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최악의 폐해는 과도한 바쁨에 내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야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주말 근무도 일상인 시절이었다. 광고회사 안에서도 특히, 기획과 제작 파트는 그런 생활을 당연시했다. 광고 일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문제가 있는 거라는 생각을 못한 것이 문제”라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다.
광고주의 오더가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오는 일도 잦았다. 월요일 오전 회의 전에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감기한도 낯설지 않았다. 선배들은 ‘너무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듯 받아들였다. 팀장의 스타일에 따라 주말 중 하루라도 쉴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주일 내내 야근과 주말근무가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회사의 월요일 아침 회의에 광고시안이 올라가 있곤 했다.
“문제는 광고주가 아니라 선배들이다”
한 동료는 그렇게 푸념하기도 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광고주보다 그런 요구에 맞춰 ‘어떻게든’ 해낸 선배 광고인들이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아무튼, 이 나쁜 전통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후배 광고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갉아 먹었다.
21세기도 20여년이 지난 요즘은 확실히 광고주도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다. 합리적으로 일하는 광고주가 많아졌다. 클라이언트-광고회사의 관계를 수직적인 갑을관계가 아닌 파트너로 인식하고 그에 걸맞는 프로세스를 함께 협의하는 곳이 많아졌다. 진짜 감사한 일이다.
요즘의 문제는 광고주도, 광고계의 선배들도 아닌 나로부터 발생한다.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것에 익숙해진 내가 문제다. 어쩌다 정시에 퇴근하거나 주말에 바쁜 일이 없으면 즐거운 게 아니라 불안해지는 것이다. 혹시 내가 일을 게을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미루고 있는 일이 있나? 어이없는 자기검열에 스스로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이게 글로만 읽고 말로만 듣던 <자본주의의 자발적 노예>의 사고방식 아닌가.
이런 생각과 태도의 관성은 업무 밖 생활로 확장된다. 시간이 비워져 있는 것이 불안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뭐라도 짜임새 있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부담이 저절로 생긴다. 쓸모있는 시간에 대한 강박이랄까.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깝다. 스케쥴표에 빽빽하게 채워지지 않은 날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곳이 편하지 않다.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악기를 배우거나. 글을 쓴다거나. 뭐라도 생산적인 것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마음 속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나에게 점잖게 경고를 해주는 듯한 광고카피가 있다.
人生に、ムダな時間を。
인생에, 쓸데없는 시간을.
일본의 OTT플랫폼인 U-Next의 옥외광고의 카피이다. U-Next는 넷플릭스, 아마존프라임 등 외국계를 제외하면 일본업체로는 가장 많은 가입자를 가지고 있는 OTT다. 영화, 드라마, 예능 등 영상콘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는 고객의 시간을 두고 경쟁한다. 그래서일까, 가격경쟁력이나 콘텐츠의 숫자, 강점이 있는 분야 같은 특징이 아니라 시간의 가치를 먼저 역설한다.
이 광고는 인생을 빡빡하게 채우고 있는 To Do List에 끌려다니지 말라고 말한다. 쓸데있는 일에 치이지만 말고, 쓸데없어 보이는 시간을 좀 더 사랑하고 조언한다. 바디카피를 읽어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전략) 인생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언제였을까.
120분 동안 두근거렸던 게 언제였을까.
누구나 삶의 방식을 다시 돌아보는 지금.
어른일수록 좀 더 쓸데없는 시간을 사랑해도 좋다.
그것이 매일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후략)
‘쓸모있는 것’들로만 꽉 찬 삶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시간이 준 삶의 여백이 쓸데있는 시간의 힘을 만들어준다. ‘쓸모있는 시간’의 쓸모를 더욱 명징하게 해주는 것이 ‘쓸데없는 시간’이다.
심지어 아이디어를 낼 때도 ‘쓸데없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는 집중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뇌를 놔두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는 회사의 책상이나 회의실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이나 샤워하다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걸 알면서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쓸데있는 것들만 찾게 된다.
“무료한 시간이 없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몇 년 전의 어느 날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 공허해진 마음에 문득 든 생각이었다. 심심해 본 적이 언제였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료하다고 느낌을 가져본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쓸모있는 일만 좇아가다가, 여유도 없어지고 나의 내면을 바라볼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쁘게 짜여진 시간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었다.
이렇게 광고카피를 다시 꺼내 읽으며, ‘쓸데없는 시간’의 필요성을 떠올려 본다. 이번에는, “반드시 시간을 쓸데없이 써보리라” 다짐해 본다. 쓸데없이 시간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하다니. 쓸데없는 시간을 소중하게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옛날 사람의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