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시간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떤 감정은 너무 익숙해서,
나조차도 그것이
'지금의 내 감정'인 줄 알고 반응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감정 반응이나 관계의 패턴은
무의식 속에 오랫동안 익혀온
‘생존 전략’ 일 수 있다.
그 전략은 아주 어릴 적,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의 한마디나 표정하나에
자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유 없이 억울하거나,
이유를 말할 수 없는데도
서운하거나,
누구보다 잘 지내는데도
부러움이 불쑥 올라올 때.
그 감정은 어쩌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어린 나'가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몇 살로 반응하고 있을까?"
‘지금의 나’로 생각하고,
‘어제의 나’로 설명하지만,
지금 이 감정을 정말 '지금' 느낀 걸까,
아니면 과거의 감정이
다시 재생된 것일까.
우리는 피부 나이,
혈관 나이,
뼈 나이까지 측정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서의 나이는 좀처럼 돌아보지 않는다.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고
반응의 형태로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서운해하거나 기대하는 패턴,
거절당할까 먼저 말하지 못하는 관계의 방식은
'수동–수용–의존'이라는 이름으로도 설명된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지지받고 싶은 마음,
보호받고 싶은 마음은
어릴 적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내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살아있다.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감춰졌을 뿐이다.
겉모습에 드러나지 않는 정서처럼.
이미 어른이 된 지금,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정말 필요할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건
지나온 시간만큼의 무게는 안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도 어쩐지 자꾸만 마음이 그 시절의 나로 향할 때가 있다.
바로 바라보기가 어렵고
모른 척하게 되는 건
왜일까?
정서적으로 여전히 충족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마주하는 게 잘못된 것이라고
혹은 누군가를 탓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겁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부모님은 지금의 부모님이 아니고,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지금도 그때처럼 반응할 때가 있다.
시간은 흘렀는데
감정은 그 자리에 머문 것처럼.
몸은 어른이 되었는데,
감정은 여전히 아이인 것처럼.
혹시 내 마음이 시간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오늘
다시 돌아본다.
잘 자란 것도, 잘 버틴 것도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괜찮은 척’이라는 이름의 생존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과거의 영향을 받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