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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Feb 15. 2021

아내에게 회식 좀 가라는 소리 듣는 법

육아휴직 복직 후 아내는 내가 매일 일찍 집에 들어오는 걸 진심으로 걱정했다. 아내는 내게 종종 "너무 일찍 집에 오는거 아냐? 사회생활하려면 야근도 좀 하고 회식도 하고 해야지. 자기, 혹시 회사에서 왕따 당하는 거 아니지?" 묻곤 했다. 내가 일찍 집에 오는 이유가 회사에서 적응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내가 다시 퇴사한다고 말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실 송년회가 있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이 야근을 하는지 회식을 하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육땡퇴(여섯 시 땡 하면 퇴근)를 하는 나는 실 송년회에도 참석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둘째 출산이 임박한 아내가 혼자 첫째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명목적인 이유였지만, 딱히 회식에 참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내에게 송년회가 있다는 걸 말하면 또 가라고 잔소리할 것 같아 굳이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웬만한 회식은 다 빠지는 나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회사원인지라 일 년에 하루밖에 없는 송년회에, 게다가 나 빼고 실 전원이 참석하는 회식에 얼굴이라도 비쳐야 할 것 같은 습관성 눈치가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전날 회식이 있다고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이 회식 당일 저녁에 오셔서 첫째를 봐주신다고 했다. 부모님이 오면 내가 조금 늦게 들어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더 고민이 됐다*.


(*) 둘째 출산 예정일이 이듬해 1월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조산기가 심해 10월부터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아내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고 언제든지 진통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모님은 시간을 내서라도 우리 집에 와있으려고 했다.

 

회식 당일. 오후 4시. 아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본인 상태가 괜찮아서 우리 엄마 아빠에게 안 오셔도 된다고 연락을 드렸다는 것이다. 아내와 부모님은 여전히 그날이 송년회 날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내의 연락을 받은 나는 '이건 회식에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하며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우리 실 송년회 있는데 엄마빠 오시면 잠깐이라도 회식에 갈랬는데 안 오시니까 그냥 집에 갈게."

 

아내는 내 카톡을 읽고 한동안 아무 말 없다가 잠시 뒤에 답장이 왔다. 

네가 회사 송년회 안 가고 집에 올라 그런다고 어머님한테 말씀드렸어. 오신대." 



바로 엄마에게 카톡을 했다. 

"나 회식 안 가도 돼요." 


엄마가 답했다. 

"아들아. 가거라."

 

결국 회사 송년회에 참석했다. 나는 "엇, 대리님 집에 안 가도 돼요?" 라거나 "와, 대리님이랑 술 먹을 기회 얼마 없는데. 짠해요!"와 같은 말들을 회식 내내 들어야만 했다. 한 선배가 웬일로 집에 안 가고 회식에 왔냐며 물었다.

 

"집에 가려했는데 아내가 저 회식에 참석시키려고 우리 엄마 아빠한테 일렀어요. 당신 아들내미가 중요한 회식에 빠지려고 한다고."

 

중학생 아이를 둔 부장이 내 말에 소리를 질렀다.

"재수 씨가 현명하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오오 거리면서 웅성웅성거렸다. 웅성웅성. 대리님 와이프 같은 사람이 없어요. 웅성웅성. 대리님 와이프 내조가 엄청나네요. 웅성웅성. 결혼 잘했네. 웅성웅성

 

그 웅성거림 가운데 옆에 앉아있던 선배가 조용히 말했다.

"야, 고마운 줄 알아."

"네?"

"나 오늘 실 회식 있다고 하니까 와이프가 뭐라 그러는 줄 아냐? 그렇게 회사가 중요하냐고 그러더라."


"선배님 아내가 고마운 줄 아세요. 제 와이프는 지 살자고 저를 전장에 내보낸 거예요."라고 말하려다 즐겁게 술 먹고 있는 사람한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인 것 같아 관뒀다. 

 

그날 나에겐 내 아내를 내조의 여왕으로 추앙하며 건배 권하는 회사 사람들과 회사 잘 다니라며 회식 권하는 가족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술 권하는 사회는 진리인가 보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회식 좀 가라는 말을 듣고 싶으면 회사에서 왕따인 게 아닌가 걱정하게 만들면 된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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