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인사와 평가의 계절

by 고베리슬로우

1.


연말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겠지만, 회사원에게는 나이 먹은 것만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평가와 인사(승진)다.


가장 먼저 임원 인사가 나온다. 하지만 직원 입장에서는 직속 임원이 아닌 이상 누가 사장이 되고 어느 임원이 집에 가는지는 가십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직은 먼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이다.


팀장 인사부터는 다르다. 팀장 인사부터는 같은 ‘팔로워’였던 사람이 공식적으로 ‘리더’가 되는 모습에서 직원들은 ‘내 이야기’처럼 이입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팀장이 되고 어떤 사람이 팀장이 되지 못하는지는 회사에서 바라는 리더상이 어떤 사람인지와 자신이 이 회사에서 리더가 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간접적인 기준이 된다.


최대 관심사는 역시 본인의 평가다. 회사가 최근 몇 년 간 직원 간 경쟁을 과열시키고 있다. 극단적인 상대평가와 그에 따른 보상으로 직원들의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특히 일 잘하는 사람에게는 그 보상으로 조기 진급을, 일 못 하는 사람에는 징벌적으로 진급 누락을 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조직에서 조기 승진자를 배출하냐 못하냐가 그 조직의 장의 자존심 문제가 되면서 매해 모든 조직에서 최소 한 명씩 조기 승진자가 나온다. 한정된 파이를 조기 진급자에게 몰아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승진 누락자도 조기 진급자 수만큼 늘어났다. 불과 1~2 년 전만 해도 조기 승진자도, 승진 누락자도 없이 다 같이 비슷비슷하게 해 먹는 훈훈한(?) 분위기였으나, 이제는 가차 없이 앞서가는 사람과 뒤처지는 사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평가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건데, 이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2.


회사 지인들이 연말을 맞이하여 육아휴직 중이었던 나를 점심 식사로 초대했다. 얼마 전에 나온 회사 인사의 내막을 자세히 들려줬다. 그들에 의하면 올해 인사는 ‘대체로 예상했던 대로 이뤄졌다’는 평을 받는다고 한다. 현재 경영층 사이에서 라인이 워낙 명확한 데다가 올해 실적도 좋았다는 게 그 이유.


“내가 연차가 차서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회사가 점점 바뀐 건지 모르겠지만 올해 임원 인사 보면서 유난히 사내정치가 중요하구나 느꼈어. 이전까지는 실력 있는 사람이 임원 달고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실력보다는 윗사람들한테 잘하고 잘 챙기는 사람이 임원 되는 것 같더라고.”


동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이제 회사 생활 10년 차가 다 돼가는데, 그걸 이제야 느꼈다니 그동안 '비교적' 마음 편히 회사를 다녔겠구나. 그런 정치싸움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주위에 정치 놀음하는 사람이 없었구나. 그것만으로 남들에 비해 불필요한 정신적 육체적 체력소모를 겪지 않았겠구나' 싶었다. '상처 받지 않는다면 나이가 들어도 순진함을 유지할 수 있겠구나.'라는 잡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결국 육아휴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너무 어린 연차에 힘도 빽도 없이 사내에서 가장 정치놀음이 심하다는 부서에 놓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그런 이야기는 점심 먹고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 그들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원래 그런데 지금까지는 안 보였던 게 아닐까. 그게 결국 라인이니 인맥이니 정치니 하는 것들 아니겠어? 라인 있는 사람들끼리 다 해 먹는 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동갑내기 1년 후배가 고급진 비유로 내 말에 동의했다.


“원래 빠는데 장사 없다잖아요.”


3.


점심 식사가 끝날 즈음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회사 나갈 마음까지 먹은 사람으로서 우리한테 조언 하나 해줘요. 우린(=아직 회사에 배팅을 할지 아니면 나처럼 회사에서 미련을 버릴지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회사 생활을 하는 직장인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억누르고 있던 내 안의 진지충이 결국 고개를 쳐들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리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 과장급*이니까 연차가 결코 낮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우리 정도 연차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을지 7할은 결정됐다고 봐. 3할 정도의 가능성으로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엎을 순 있겠지. 앞서가던 경쟁자가 갑자기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하고 지금까지 들인 노력의 몇 배를 들이다 보면 또 그 모습을 인정해주는 상사를 만날 수도 있겠지.


(*) 나는 육아휴직 등의 이유로 진급을 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던 후배들이 나보다 먼저 과장을 달았다.


문제는 회사를 다니다 보면 본인의 위치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게 돼. 비록 내가 회사에서 잘 나간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임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거지. 본인들은 안 그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른보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별다른 대책 없이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게 마음 깊은 곳에는 오랜 기간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생각 또는 바람이 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거겠지.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 소위 잘 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외에 회사에서 키우는 사람들은 또 따로 있다는 거지.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회사에서는 절대 소문내지 않아. 조용히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하고 팀장이나 임원으로 나타나. 한 마디로 주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애들 위에 진짜 날고 있는 애들이 있다는 말이야.


본인들이 각자의 현재 위치가 정확히 어딘지를 먼저 생각해 봐.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회사를 다닐지 고민해 봐. 만약 지금까지 잘 해왔다고 생각하면 더 좋은 기회를 잡으려고 해 봐. 아직 그렇게까지 회사에서의 성공을 위해 인생을 희생할 각오가 되지 않았다면 최소한 지금까지 잘 쌓아온 커리어의 끈은 놓지 마. 그 끈을 놓지 않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회사에서 핵심 조직이라고 하는 곳을 발을 넣어두는 것 같아. 그 안에서도 핵심 업무와 그 업무 할 거면 그 팀에 왜 가? 하는 쩌리 업무가 있겠지만 설사 쩌리 업무를 할지라도 어쨌든 그 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게 중요해. 그게 아니라면 빨리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아니 빨리 놓는 게 좋겠지. 어중간하게 어버버 거리다가 나이만 먹느니.”


다들 나의 진지충이즘(진지충ism)에 전염되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전염병을 줬으니 치유도 해줘야겠다 싶었다.


“뭐, 어쨌든 나처럼만 안 되면 돼. 내가 여기서 우리 회사에서 제일 실패한 사람이잖아. 실패한 사람 말 너무 심각하게 들을 필요 없어.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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