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코밸 : Work-Corona Balance. 워크-코로나 밸런스의 준말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일과 삶의 균형, 새로운 근태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 글의 제목을 생각하다가 내가 만들어냈고 다분히 끼워 맞췄기 때문에 괜히 어디 가서 써먹지 않길 권장한다.
끝났다.
내일, 두 달여 만에 출근한다.
2.15일 첫 재택근무가 시작됐고, 4.6일인 내일 출근한다.
오늘은 오후 네시부터 아내와 잔치를 했다. 차돌박이를 사서 구워다가 오랫동안 아껴둔, 집에서 가장 비싼 와인과 함께 먹으며 재택근무의 끝과 다시 하는 출근을 기념했다. 나이가 들면서 기념할만한 이벤트가 있으면 허투루 넘기지 않고 조촐하게라도 기념하려고 한다. 스스로, 의식적으로 기념할 일을 챙기지(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내 인생을 기념해 주지 않는다. 기념할 일이 없어질수록 추억할 일들이 없어진다.
아내는 한 시간 전에 곯아떨어졌고 나는 지금 막걸리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쓰지 않으면 영영 쓸 수 없는 글들이 있다. 아마 이 글이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잘 쉬다가 가겠네."
재택근무가 끝나 내일 출근한다고 하니 친구가 말했다. ‘재택근무가 어떻게 쉬는 거지? 재택근무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잘 쉬었다. 물리적인 출퇴근과 회사 사람들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이런 회사 생활이라면 죽을 때까지 회사를 다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일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회사에 출근할 때보다 더 많은 성과를 창출한 것도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했으면 더 오래 걸릴 일들을 더 짧은 시간에 해냈다. 한 마디로 업무 효율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코로나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고립된 공간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돼서 힘든 일들도 있었다. 재택근무 기간 동안 나는 집 밖에 나간 게 평균적으로 하루 30분을 넘지 않는다. 그 30분은 강아지 산책, 쓰레기 버리기와 분리수거였다. 아내도 비슷하게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답답하지 않냐고 물었다. 나와 아내는 집돌이, 집순이라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평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여행을 다니는 부모들을 보면 ‘우리 애도 데리고 나가서 많은 걸 보여주고 해야 되는데’ 하는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있었는데, 그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핑곗거리가 생겨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밥 먹고 일하고 육아하고 모든 걸 다 해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두 달 동안 한 번도 집 밖을 나가지 못한 딸의 신경질을 받아주는 건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자연스레 많이 다투는 시기도 있었다. 싸우기가 지쳐 아내에게 "이럴 거면 출근하는 게 낫지. 나 내일 그냥 출근할게!!" 말하기도 했지만 진심이 아니었고 실제로 출근을 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짜증이 나도 회사보다는 집에 있는 게 낫다. 짜증은 회사에 출근을 했어도 있었을 것이다. 똑같이 짜증 난다면 집에서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서 짜증 나는 게 낫다.
이틀 전 회사 대표가 전 직원에게 메일을 돌렸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단계적으로 출퇴근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내일부터는 출근을 하되 자기 자리에서 일할 때 빼고는 마스크도 항시 착용하고, 열 시부터 네시 사이를 집중 근무 시간으로 지정하여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율적으로 출퇴근함으로써 출퇴근 러시아워를 피하라고 했다. 출근을 하더라도 대면 회의는 금지, 반드시 해야 한다면 꼭 마스크를 쓰고 하기, 직원 출근율을 60%를 넘기지 말고 어쩌고 저쩌고. 메일을 읽으며 이렇게 할 거면 왜 굳이 출근을 시키는지 짜증이 났다.
물론 경영층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 환갑이 코 앞인 대표도, 50대 초중반의 임원도, 40대 중후반의 팀장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럴 것이다. 그들도 무엇 하나를 선택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출근을 하되 코로나에는 걸리지 않는 절충안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하는 것과 그걸 아무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이야기다. 그들과 똑같은 월급을 주면 불만이 없겠지.
2년 전에 퇴사 대신 육아 휴직하길, 1년 전에 퇴사 대신 복직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 출근하지 않고 월급을 받는 잼은 꿀잼 중의 꿀잼이었다. 만약 그때 퇴사의 유혹에 굴복했다면 내 어찌 이 꿀잼을 누렸겠는가. 만약 그때 퇴사를 했는데 회사가 재택근무를 한다고 했으면 배가 너무 아프고 속이 쓰려서 머리털이 다 빠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해야 할까. 재택근무를 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집에서 일을 해보니 비로소 일을 아예 하지 않는 것, 가령 휴가의 참맛을 깨달았다.
매일 회사에 출근할 때는 출근을 하지 않는 것과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구분 지어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재택근무를 통해 출근을 하지 않고 일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출근을 하지 않더라도 일을 한다면 출근할 때와 비슷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오히려 출근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매일 출근하는 게 당연할 때는 출근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었는데, 재택근무를 하고 나니 우리가 원하는 건 아예 일을 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 회사 이야기는 역시 '기승전 퇴사'가 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