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코밸 : Work-Corona Balance. 워크-코로나 밸런스의 준말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일과 삶의 균형, 새로운 근태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 글의 제목을 생각하다가 내가 만들어냈고 다분히 끼워 맞췄기 때문에 괜히 어디 가서 써먹지 않길 권장한다.
두 달여 만의 출근은 엄청난 업무 효율성의 하락을 동반했다. '굳이 집에서 일 잘하고 있는데 왜 부르고 지랄이야. 정부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연장했는데 얘(회사&경영층)들은 뭘 근거로 직원들을 출근시키는 거야.' 같은 불만이 내 안에 가득 차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높은 연봉을 쳐 받으면서 줏대도,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정성도 없이 직원들을 출근시킨 무능한 리더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하지만 일은 하지 않는 소소한 반항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반항심 때문에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 건 아니다.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집에서 일을 하다가 회사에 와보니 쓸데없이 말 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 처리할 일들을 같이 있으니까 굳이 묻고 논의를 하고 싶어 한다. 연차가 높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처리하기보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편한 건 이해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질문과 듣고 싶지 않은 조언들이 업무의 흐름을 끊었다. 재택근무를 통해 그런 게 없는 업무환경을 경험해보니 그런 불필요한 관심과 논의를 가장한 잡담이야말로 업무 효율을 저하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번 재택근무 기간 동안 업무적인 면에서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다. 자신감이 아니라 자존감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일을 잘한다는 자신감은 항상 있었다. 자신감은 있는데 자존감은 없었다.
육아휴직 전 3년 동안 의미라고는 단 1도 느끼지 못한 엑셀 작업과 보고서 작성 작업을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매일 매 순간 자문했다.
'지금 당장 답은 모르겠지만 하다 보면 답이 나올 거야'. 꿈도, 하고 싶은 일도 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던 어린 시절 외던 주문을 소환하여 버텼지만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나를 활용한 선배들의 이기적 잔인함 아래서 난 결국 길을 잃었다. 그때 자존감을 함께 잃었다. 그때 겪은 자존감 상실이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정신병들의 씨앗이 되었다.
퇴사 대신 선택한 육아휴직 후 작년에 복직했지만 여전히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머리로는 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 사람인지 알면서도(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임) 목소리 내기가 두려웠고,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무엇보다 질문하기 무서웠다. 무턱대고 비난부터 하던 선배들이 떠올랐다. 잘못된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런 상처를 다시 받고 싶지 않았다. 다시 상처 받기가 두려웠다.
코로나가 터지고 아무도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은 나에겐 업무적으로 다시 자존감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이 사라지자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또한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회식과 같은 네트워킹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온전히 업무적으로만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야 했기에 일 잘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이 확실히 드러났다. 물리적으로 함께 해야 했기 때문에 해야 했던 허례허식과 정치질이 더 이상 소용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일처리 하는 사람들이 부각됐다.
나같이 알아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일처리를 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난 단 한 번도 출근하지 않았지만 회사에 출근해 자리를 지켜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쉬지 않고 나를 찾았다. 나는 일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사람이 없었다(물론 필요한 자료들은 있었다. 그 자료들은 대부분 회사 서버에 있거나 메일로 공유받는 자료들이었다. 난 기본 자료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공하여 사용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했다.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임원이든 팀장이든 부장이든 뭐든 내가 걸러서 받았다. 내 업무 하는 데 지장이 없으면 다시 연락 주지 않았다. 지가 급하면 다시 연락하겠지 생각했다.
그 모든 것들이 재택근무가 끝나고 회사에 출근하면서 사라졌다. 사무실에서 알게 모르게 쇼잉(showing)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일 처리만 하는 난 다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불쑥 끼어들었고 누구와 회의를 하면 왜 회의를 했냐고 물었다. 1분이면 의사결정 내릴 수 있는 사항들을 사람들은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말을 해대며 30분을 끌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들이 의사결정을 내리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쓸데없는 말로 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해놓고 결국 결정과 후속처리는 나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생색은 지들이 냈다.
한 번 회의하면 한 시간은 무조건 채워야 하고, 한 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자기가 알고 있는 건 다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영혼 없이 그들과 눈 마주치고 그들의 말에 고개 끄덕이고 네네 거렸는지, 거기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다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좋겠지만 그 이유가 코로나가 악화돼서라면 절대 재택근무를 반기지 않는다. 코로나가 악화되거나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오길 바라면서까지 재택근무를 바라진 않는다. 다만 인류의 건강에 큰 위협을 주는 전염병 때문이긴 했지만 우리는 어쨌든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고, 그 상황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경험을 했다. 코로나가 지나가도 마치 그 경험이 없었던 일인 듯 여길 게 아니라 재택근무와 같은 긍정적인 경험들은 잘 모아다가 그것들이 뉴 노멀이 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더 이상 출근을 해야지만 회사가 돌아간다는 믿음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몸소 경험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상'은 전염병이 없는 건강한 사회지, 회사원은 반드시 출근을 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는 사회가 아니다.
코로나는 반드시 가고 재택근무는 부디 돌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