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복직 후 업무분장이 애매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곤 한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회색 지대에 있는 일, 그러니까 누가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아무도 안 해도 역시 이상하지 않은 일들은 웬만하면 내가 했다. 내 일을 하는 김에 남의 일도 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일을 선배한테 미룰 때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선배가 나보다 일을 많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할 수도 있는 일을 하지 않아 결국 후배에게 일이 전가될 때는 마음이 무겁다. 그럴 때마다 되뇌는 말이 있다.
"나는 선배로서의 도리를 다 했다."
후배들을 위한 의도는 단 1도 없고, 온전히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우리 회사에서 육아휴직 1년을 다 사용한 최초의 남성이다. 나 때문인지 증명할 수 없지만 내 육아휴직 이후로 많은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육아휴직을 갔다가 복직하고 또 회사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회사 내 남성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게다가 지금은 두 번째 육아휴직을 하고 있다. 당연히 최초로 육아휴직을 두 번 쓴 남자가 됐다.
'당장' 육아휴직과 전혀 상관없는 후배들 입장에서는 내가 회사에서 사연(=회사 사람들이랑 사이가 안 좋아지고 커리어가 꼬여서 퇴사하기 위해 육아휴직 썼다가 복직함)이 좀 있다고 딱 내 일만 하고 퇴근시간 되면 제일 먼저 집에 가고 회식도 일절 참석 안 하는 선배 같지 않은 회사원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육아휴직을 두 번이나 간 최초의 남성이라는 선례를 만들어주는 것 자체가 그 누구보다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해줬다고 생각한다. 시쳇말로 남성 육아휴직에 있어서는 '총대를 메줬다'는 말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는 우리 회사 남성 육아 휴직계의 선구자(라고 사람들이 불린)다. 내 전에 많은 남자 선후배들이 육아휴직을 쓰고 싶었지만 불이익을 당할까 봐 사용하지 못했다. 실제로 나는 처음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기에 진급에서 누락하는 등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했다. 서로의 허물을 물고 뜯고 아무도 자신의 이권은 희생하려 하지 않는 대기업에서 (의도하진 않았지만)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두 번이나 육아휴직을 쓴 첫 남성이 되는 총대를 멨으니 내가 일 좀 안 하더라도 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내가 아무 일도 안 하더라도 회사에 출근하고 숨만 쉬고 앉아 있어도 웬만한 선배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이 글을 왜 쓰게 됐는지 기억은 안 난다. 쓰고 나니 좀 낯 부끄럽지만 글에 담긴 마음만은 진심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