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일주일에 3-4일은 혼늦점을 한다. 회사마다 부서마다 문화가 다르겠지만 회사원들은 보통 특별한 약속 없으면 팀 사람들과 점심을 먹는다. 복직 후 한 달 반이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팀에서 점심을 먹은 건 딱 한 번이다. 그것도 '팀 대 팀 식사*'였다.
(*) 팀 대 팀 식사 : 업무 특성상 협업해야 할 일이 많은 팀끼리 서로 편하게 업무 요청을 하기 위해 인간적으로 유대감을 쌓는 식사를 말한다.
팀에서 점심을 안 먹기 시작한 건 육아휴직 전부터였다. 팀 사람들이랑 굳이 점심까지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친한 선배, 동기, 후배, 심지어 다른 회사에 다니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처음에는 팀 사람들에게는 약속이 있다 말이라도 했지만 매일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팀 사람들은 나보고 약속 있다고 해놓고 사내식당에서 밥 먹는다고 눈치를 줬다. 그들은 약속이 있으면 꼭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대놓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을 이 자리를 빌려 말한다.
"어디서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누구랑 먹는 게 중요한 거죠. ^^."
한 번은 팀 선배가 날 불렀다. "팀에서 점심 좀 먹어요. 오늘도 다들 사라져서 내가 혼자 본부장님 모시고 점심 먹었잖아. 나 술도 잘 못하는데 그 양반은 맨날 점심에 반주까지 한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대리가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웃으면서 "알겠어요. 앞으로 좀 먹을게요." 답하곤 그 이후로도 팀에서 점심을 먹는 일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누가 그렇게 하래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거 선배가 평가 잘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 눈치 더 보라고 저보다 월급 더 많이 받으시는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하지 않았다. 그때 그냥 말할걸.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가 결국 육아휴직을 하게 된 원인의 9할 이상이 그 선배 새끼 때문이란 걸 생각하면 그때 말하지 않은 게 두고두고 한이다.
혼자 점심을 먹을 때면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자기계발 시간을 가졌다. 발전이 없으면 앞으로 내 인생은 지금 같은 지겨운 생활이 이어질 거라는 위기감도 있었지만 뭔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생산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싶었다. 퇴근 후 시간 또는 주말을 헌납하면서까지 열심히'만' 살고 싶지는 않아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뭐든 해보기로 한 것이다.
육아휴직 전에는 주로 책을 읽거나 필사를 했고 요즘에는 글을 쓴다. 11시 30분에서 40분 사이에 스리슬쩍 자리를 떠서 회사에 갖다 놓은 개인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간다. 글을 쓰다 보면 금세 12시 30분 정도가 된다. 노트북을 사무실 자리에 갖다 놓고 사부작사부작 가벼운 발걸음으로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온다.
이런 나의 점심 패턴을 회사에서 친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친한 동료가 했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우리 회사에서 네가 제일 멋진 거 같아. 남의 돈 받으면서 네 일하고 있는 거잖아."
"점심시간은 내 시간이고, 그 시간 활용해서 하고 싶은 거 하는 건데 뭘 남의 돈 받으면서 하는 거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고. 누가 너처럼 그렇게 눈치 안 보고 점심시간을 하고 싶은 대로 사용하냐.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팀에서 점심 먹잖아. 눈치를 안 본다고 할지언정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든지 어쨌든 사무실에서 벗어나는데 너처럼 사무실 한가운데서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야. 포주의 몸에 침투해서 알을 까는 거 같은 거지."
"형. 포주 아니고 숙주."
비유가 썩 나의 행동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 더 대꾸하지 않았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점심시간이 아니라 근무시간에 글을 쓴다면 그 비유가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언젠가, 일이 없는 한가한 날에, 어쩌면 임원이랑 팀장이 함께 외근을 갔거나 휴가를 가는 날이 있다면 사무실 내 자리에서 그 알을 한 번 까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