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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Aug 16. 2021

상위 1%의 글

첫 번째 육아휴직을 하고 오랫동안 하기로 생각만 하던 글쓰기를 시작했다(그게 벌써 3년 전이다). 30년 넘게 속으로 묵혀오던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오늘은 이런 글을 써봐야지.'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한두 시간 만에 글 하나가 뚝딱 써졌다. 오타 수정 말고는 퇴고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내 안에서 오랜 기간 정제된 생각들은 그 자체로 완성형의 콘텐츠가 되어있었고 난 그 콘텐츠를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조금 더 잘 쓰고 싶다는 욕심에, 그리고 내 글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서울시민대학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매주 1회, 총 10주 동안 진행됐고 글쓰기 선생님은 이문재 작가님이었다. 이문재 작가님의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의 시 '농담'*을 접해 본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나 또한 그랬다). 매주 이문재 작가님이 주제를 던져주면 글을 써서 제출하고 수강생들의 글을 함께 읽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마지막 10주 차 수업의 글쓰기 주제는 '내가 살고 싶은 집'이었다. 수업 시간에 이문재 선생님이 내가 쓴 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금까지 수년간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천명이 넘는 수강생에게 '내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해 글을 쓰라고 했는데 이런 글을 처음이다. 모든 수강생 중에서 상위 1%에 속하는 글이었다."


그때는 그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내 안에 작은 불꽃처럼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6학년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받았던 글쓰기 장려상 이후 받은 최초의 글쓰기 상 같았다. 상장도 상금도 없고 누가 알아주거나 내가 딱히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그 불꽃은 더욱 타올랐다. 굳이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괴감이 엄습해오는 모든 순간에 이문재 작가님의 칭찬이 쪼그라드는 나의 자존감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주곤 했다.


지금부터 그때 내가 썼던 글,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글이 끝나면 왜 그렇게 극찬을 받았는지 이유를 적어놓았다. 가능하다면 아래 글을 읽기 전에 '내가 살고 싶은 집'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싶은 집'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5개에서 10개 적어본 후에 글을 읽어보길 권장한다.




나에게 집이란 '세상과의 단절을 바탕으로 나만의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나는 집에 있을 때는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자극들을 일절 거부한다. 단절의 틈이 생긴다면 적어도 그 틈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으로 발생해야 한다. 내 안에 '세상과의 연'이라는 전구가 있어 집 문을 경계로 하여 밖으로 나갈 때는 전구에 저절로 불이 들어오고, 집으로 들어올 때는 저절로 그 불이 꺼지면 좋겠다. 그 스위치는 오로지 나만 작동시킬 수 있다. 물론 TV도 있고, 스마트폰도 있고, 바깥세상에서 내가 끌고 들어오는 걱정 근심 같은 것들도 있어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되기 쉽지 않지만,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내가 원하는 수준의 단절은 가능하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단절 자체가 아니라, 단절을 바탕으로 나만의 세상을 펼치는 것이다. 내 세상의 형태는 그때그때 다르다. 12시간이 넘는 잠으로 채워질 때도 있고, 혼자 마시는 소주와 읽고 싶었던 책들, 아니면 내 고양이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만이 있을 때도 있다. 그 세상들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내가 원치 않는 자극들로 인해 지친 내 오감이 휴식을 취해야 하고, 내가 원치 않는 자극들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독립성이 필요하다. 물리적 독립성은 외부와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일상 속에서 사람의 오감 중 가장 쉬기 힘든 감각이 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청각이라고 생각한다. 시각, 촉각, 후각, 미각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의지나 노력에 따라 원치 않는 자극을 조절할 수 있지만 청각적인 침범은 나의 조절 가능 범위 밖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창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복도에서 사람이 오가며 내는 소리, 화장실을 통해 들려오는 옆집 개 짖는 소리, 흔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아래층 에어컨 공사 소리 등 우리는 알게 모르게 소음공해 속에서 살아간다.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이웃 간 갈등이 ‘층간 소음’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음공해는 외부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시침 소리 나 냉장고 소리, 가족이 보는 TV 소리 등 내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은 많다. 그런 소음들이 끊이지 않고 쌓이면 내 안에서 잡음이 된다. ‘잡’자가 들어가는 단어 중에 ‘잡채’와 'job'말고는 좋은 걸 본 적이 없다.


내가 원하는 집은 명확하다. 아기 돼지 삼형제 중 막내가 지은 튼튼한 벽돌집같이 늑대의 강한 바람에도 버티는 튼튼함은 기본, 바람 속에 섞인 늑대의 입 냄새나 바람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는 기능이 탑재된 집을 원한다. 거기다가 벽이 두꺼워 옆방의 소리가 안 들리는 집을 원한다. 하지만 그런 집은 내가 직접 짓지 않는 이상 갖기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정도의 방음을 얻으려면 벽이 얼마나 두꺼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넓은 집을 원한다. 집의 가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라도 하루에 10-20분 만이라도 내가 적막 속에 있을 수 있는 집. 같이 집에 있는 나의 가족으로부터도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집. 그런 집에서 나는 오히려 풍부하게 세상과 살아갈 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실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글이다. 그때는 마냥 괜찮게 느껴졌는데 다시 읽어보니 문장이 조잡하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왜 이문재 작가님이 그렇게 극찬을 했는지는 오히려 지금 더 잘 알 것 같다.


"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내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면 도시를 떠나 교외에 주택을 지어서 한적하게 살고 싶다거나 집 자체를 묘사하는 글을 썼는데 집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 집중해서 쓴 글은 처음이었다."


이문재 작가님이 극찬한 이유였다. 당시 나는 육아, 특히 밤낮 끊이지 않는 우리 첫째 딸의 울음소리에 시달리다 지쳐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지경이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내가 집 밖을 나가거나 우리 딸이 집 밖을 나가는 일 없이 내가 가장 편안할 수 있는 공간에서 그 울음소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고스란히 글에 녹아 나왔다. 한마디로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었다'라는 말을 저렇게 정성스럽게 썼던 것이다.


지금은 그런 집을 원하지 않는다. 첫째는 물론 둘째도 그렇게 울어대는 시기가 지났다.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당연히 내가 살고 싶은 집도 달라졌을 것이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이 없는  보니 다행히도 지금은 3 전보다 심적으로 여유가 있는  같기도 하다. 다만  반대급부로 지금 그에 대해 쓰라고 한다면  위의 글과 같이 누군가에게 '상위 1%' 감동(?)   있는 글을   없을  같다. 역시 진정성 있는 글은 결핍에서 우러나오는 법인가보다.



(*)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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