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에서 나와서 사무실에 도착하고,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간단히 산책을 하고, 저녁에 사무실에서 나와 집까지 오면 얼추 1만보를 걷는다. 집에 와서 저녁 식사 후에 강아지 산책을 한다고 치더라도 내가 세운 1일 2만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근무시간에 한 번 내지 두 번의 산책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 산책이 결코 나의 업무 효율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변호의 글이다.
내가 처음 입사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부서는 항상 밖을 돌아다니며 외부 사람을 만나야 했던 곳이다. 누가 나에게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냐고 물을 때면 대관 부서(관(정부)을 상대하는 부서)라고 설명을 하곤 했는데 한 번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외부 기관(정부, 언론, 학계, 시민단체 등등)을 활용하여 회사에 이익이 되는 여론을 형성하거나 회사에 불익이 되는 정책을 막는 일을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로비였다(물론 그 과정에서 그 외부 세력에 불법적으로 자금을 주거나 그런 건 하지 않았다).
우리 부서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부서가 바쁘면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고, 우리 부서가 한가하면 회사의 경영 환경이 좋다는 뜻이다. 회사를 위해서는 우리 부서에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들 실적이 없어지지. 그래서 우리 개개인을 위해서는 회사에 적당한 위기가 있어서 우리 팀이 적당히 바빠야 한다."
실제로 내가 그 부서에 있었던 3~4년이 부서 역사상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만큼 위기가 많았다. 그 위기가 쌓이고 쌓여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가 속한 산업이 많이 망가졌다. 회사의 수익성은 결과적으로 나빠졌지만 당시 부서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고생했다는 미명하에 회사에서 승진을 하게 됐다. 이렇듯 대기업이란 개인의 실적과 회사의 성과가 별개로 평가될 수 있는 곳이다.
아무튼 그 부서에서 나는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회사 밖을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외부 사람들과 점심이든 저녁이든 식사 약속을 잡고 함께 밥을 먹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자 팀원이 보유할 수 있는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술자리도 많았다. 함께 술을 먹는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진 않지만 그래도 함께 술을 먹으면 친분이 생기고 친분이 생기면 상대방이 한 번이라도 더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곤 했다. 새벽까지 술을 먹는 날도 적지 않았는데 그 다음날에는 자연스럽게 오전 출근을 하지 않거나, 오전에 출근을 하더라도 급한 일이 없으면 사라져서 쉬다 오곤 했다.
"회사일이라는 게 책상 앞에서만 하는 게 다가 아니야.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일이고 함께 술을 먹는 것도 일이고 함께 수다를 떠는 것도 그게 결과적으로 업무와 관련이 있다면 다 일이야." 당시 부서에 함께 있었던 부장님 하던 말이다.
회사에서 우리 부서가 가장 힘든 부서 중 한 곳이며, 젊은 사람들일수록 기피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물건을 파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만큼 '영업'을 하는 부서가 회사에 없었다. 우리는 철저히 '을'을 담당했다. 회사에 영업부서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대기업이고 오랜 시간에 걸쳐 안정화된 산업인만큼 우리 회사의 영업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개념의 '영업'은 아니다. 갑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을도 아닌 것이다.
우리 부서는 항상 만나는 사람을 윗사람처럼 대해야 했다. 고깃집에 가면 고기도 구워주고 노래방에 가면 앞에서 재롱도 피워야 했다. 이런 걸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고 말로만 들은 사람들은 지레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직접 해보면 사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진 않는다.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저 사람을 대접만 해주면 된다, 이건 그저 일일뿐이다' 받아들이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크지 않다.
'갑을 관계'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도 있다. 갑은 갑질을 하고 을은 그 갑질을 당해야만 한다는 그런 선입견이 사람들을 지레 겁먹게 하기도 한다. 그 갑을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회사와 회사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접대 회식 후 노래방에 가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열심히 재롱 피웠던 어느 날, 같은 팀 선배가 택시를 기다리며 나에게 말했다. "네가 저 사람들보다 인간적으로 절대 못 난 게 아니다. 학벌도 좋고 인물도 낫고 벌이도 낫다. 인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일로 받아들여라." 가끔 우리의 관계가 비즈니스(business)라는 걸 이해 못하고 선을 넘는 상대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말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거지 항상 누군가를 갑으로 상대하고 그들을 접대해야 하는 일이 쉽거나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팀 선배들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 팀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보상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근무시간에 외근을 나갔다가 시간이 남으면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분위기 좋은 맛집에 잠깐이라도 들러서 커피 한 잔을 한다던가, 지방 출장을 갔다 오는 날에는 일찍 서울에 도착하더라도 사무실에 돌아가지 말고 집에 가게 해줬다. 그럴 때는 꼭 서울역에서 호두과자라도 하나 사서 내 손에 쥐우주며 "고생했어. 집에 가서 푹 쉬어."라고 말해줬다.
점심시간이 12시부터 1시임에도 불구하고 11시에 몰래 나와서 회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점심 원정'을 가는 날도 있도 있었다. 천천히 맛있는 점심을 먹고 2시에 사무실에 복귀해도 아무도 뭐라고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날 때 에너지를 충전하고 그만큼 밖에 나가 '외부의 적'을 물리치자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약속이 잡힐지 모르니까 어딜 가도 맛집을 알고 있어야 해. 맛집을 많이 파악해두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야."라는 '집단 합리화'를 바탕으로 우리는 서울을 곳곳을 누비며 법카로 맛집을 찾아다녔다(또는 찾아다녀야만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그런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일이란 책상 앞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아니, 믿는 수준이 아니라 그게 몸에 배었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잠깐 휴식하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듯이 나에게 산책이란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잠시나마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이다. 물론 당장 일이 하기 싫어서, 내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미루고 산책을 할 때도 있지만 그 또한 큰 그림에서 보면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한 거라고 생각한다. 산책만 하고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