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사를 준비하기 위해 시작했던 첫 번째 육아휴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서 썼던 글이다. 회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고 난 직후에 쓴 글인 만큼 조직과 후배에 대한 불만이 이글이글거리는 게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에서야 느껴진다. 물론 이제는 그런 불만이 없다는 것도, 그때보다 수그러들었다는 건 아니다. 더 하면 더 해졌지, 덜 해지진 않았다.
네이버에 '윤여정 힐링 명언'이라고 검색하면 윤여정 선생님의 힐링 명언이 좌르륵 나온다. 그중에 이런 명언이 있다.
60이 되어도 몰라요.
이게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내가 알았으면 이렇게 안 하지...
인생이 처음 살아보는 거기 때문에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어떻게 계획을 할 수가 없어.
그냥 사는 거야.
조금 하는 건
하나씩 뭘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고.
2013. tvN 예능. '꽃보다 누나' 마지막 회 중.
본방은 보지 못했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우연히 이 장면을 접하게 됐다. 머리가 띵 하는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힐링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는데 그때 처음 '이런 걸 힐링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나에게 직접 그런 말을 해주는 것 마냥 감동받고 위로받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너무 엄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도 몰라.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들었다고, 직급이 높으면 높다고, 실력이 있다면 실력이 있다고, 돈이 많다면 많다고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게 아닐까. 사실 모두가 알고 보면 이번 생이 처음인데.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지자. 어차피 우리 모두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동지들 아닌가.’
하지만 윤여정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다짐 한지 현타가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며 자신이 무슨 힘이 있느냐는 임원.
임원한테 한 소리 들었다며 당장 할 일도 없으면서 퇴근길 지키고 앉은 팀장.
후배 불러다 앉혀놓고 본인이 일은 일대로 다 하는데 윗사람들한테 인정 못 받는다고 하소연하는 부장.
이들을 보면서 왜 윤여정 선생님의 말에서 힐링을 얻었는지 깨달았다.
'나도 힘들어. 나도 몰라. 나도 고생해. 그러니까 너도 고생해야 해. 그러니까 네가 날 도와줘야 해. 그러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해.'가 아니라 ‘나도 이렇게 힘든데 나보다 젊은 친구들은 얼마나 힘들겠어.’ 하며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는 것. 그 진정성에 윤여정 선생님은 존경하는 '어른'으로 인정받고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힐링을 받는 게 아닐까.
회사에서 그런 '어른'이 얼마나 될까. 분명 나보다 지위도 높고 연봉도 높고 재산도 많을 텐데 나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본인들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을 한다. "너는 젊고 앞날이 창창한데 난 이제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도 없어." 결혼을 안 한 후배에게는 본인들은 챙겨야 할 가족이 있다는 말도 분명히 할 것이다.
후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개소리다. '자기들은 결혼하고 애도 낳고 다 했지만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했어.'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은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고 회사에 있으면 어쨌든 대우해 주는 아랫사람들이 있어서 편하겠지만 후배들은 나가면 할 것도, 놀 것도 많고 즐겨야 할 젊음이 있다.
사실 서로 상황만 다를 뿐 입장은 똑같다. 선배든 후배든 남보다는 내가 더 중요할 뿐이다.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서로 자기 군생활이 가장 어려웠다고 싸우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내가 하는 일'이고 세상에서 가장 고생하는 사람은 '나'다.
다만, '일반적으로' 선배가 후배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 후배가 선배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배들은 후배보다 자기가 더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모두가 힘든 건 매한가지지만 어찌 됐든 간에 '조직 내에서는' 선배가 후배보다는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직 안에서 업무적인 역할로서의 높고 낮음이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높고 낮은 게 아니다. 특히 조직 밖의 개인사까지 끌어들여 그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후배들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을 거면서 본인의 욕심을 위해 후배들의 시간을, 후배들의 에너지를 뺏으면 안 된다.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새벽에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그들은 서로를 껴안을까*.
제 대답은요, "서로 자기가 더 힘들다고 싸우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 잠 못 이루는 사람들 - 로렌스 티르노
새벽 두 시, 세 시, 또는 네 시가 넘도록
잠 못 이루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간다면,
만일 백 명, 천 명,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물결처럼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예를 들어 잠자다가 죽을까 봐 잠들지 못하는 노인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와 따로 연애하는 남편
성적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자식과
생활비가 걱정되는 아버지
사업에 문제가 있는 남자와
사랑에 운이 없는 여자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만일 그들 모두가 하나의 물결처럼
자신들의 집을 나온다면,
달빛이 그들의 발길을 비추고
그래서 그들의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그렇게 되면
인류는 더 살기 힘들어질까.
세상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될까.
사람들은 더 멋진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더 외로워질까.
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만일 그들 모두가 공원으로 와서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태양이 다른 날보다 더 찬란해 보일까.
또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그들이 서로를 껴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