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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Jan 24. 2022

빌려준 돈을 못 받았지만, 사람을 잃진 않았습니다

퇴근길, 권남희 작가의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라는 책에서 '하루키의 고민 상담소'라는 글을 읽었다. 작가가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 한 사연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으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 육아휴직을 막 시작했을 즈음. 군대 선임에게서 카톡이 왔다. 돈이 생기면 갚을 테니 오십만 원만 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보자마자 피싱일 거라 생각했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중에 선임으로부터 피싱을 당했다는 카톡이 오겠지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며칠 뒤 불현듯 그 카톡이 생각났다. 후속 카톡이 오지 않았다. 답장을 보냈다.

"혹시 저번에 보낸 거 형이 보낸 거 맞아?"

거의 바로 답장이 왔다.

"응."

"정말 돈 필요해서 돈 빌려달라는 거였어?"

"응. 근데 아무도 답장이 없더라. 너한테도 보내고 누구(군대 지인), 누구(군대 지인)한테 용기 내서 보냈는데 아무도 답장이 없어서 내가 잘 못 살았나 싶더라."

아니. 이 양반아. 십 년 만에 '띡' 연락 해서 아무 설명도 없이 돈 빌려달라는데 누가 답장을 하나. 생각했지만 애써 위로해줬다.

"다들 피싱인 줄 알았을 거야. 나도 피싱인 줄 알았어. 형한테서 피싱당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카톡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방금 갑자기 그런 카톡이 안 왔다는 걸 깨닫고 카톡 해봤어."

처음 돈 빌려달라는 날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더 이상 급전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물어봤다.

"형 아직도 돈 필요해?"

"응. 필요하지. 뭐 이런저런 돈 나갈 게 있는데 당장 없네."

"빌려줘 그럼?"

"빌려주면 고맙지. 근데 무리하면서 빌려주진 말고."​


이때 갑자기 이 또한 피싱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오십만 원 피싱당할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혹시나 내가 송금한 계좌가 어찌어찌해서 털려서 그 계좌로 대출이 된다거나, 아무튼 오십만 원을 미끼로 더 큰 피해를 보지도 않을까 막연한 두려움에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피싱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야 했다.

"형 지금 혹시 나한테 영상통화 걸 수 있어?"

"나 조금 있다가 퇴근하니까 퇴근하면서 전화할게."​


잠시 뒤에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받았더니 과연 선임이 있었다. 영상통화를 걸어달라고 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형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서 얼굴 보고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해달라고 그랬어."

형이 소리 없이 웃었다.

"카카오톡으로 보내주면 돼?"

"그럼 고맙지. 근데 너 무리하는 거 아니야?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데 무리해서 안 빌려줘도 돼."

"내가 돈이 많은 건 아닌데 형한테 오십만 원 정도는 빌려줄 수 있어."

"고맙다. 내가 꼭 돈 생기면 갚을게."

"돈 생기면 천천히 갚아."

"응 고마워. 진짜 내가 생기는대로 갚을게."

그 카톡을 마지막으로 1년이 훌쩍 지났다.

​​

연락은 10년 만에 닿았지만 그와 함께 군대 생활을 한건 15년 전이다. 나는 전역과 동시에 군생활의 기억을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당연히 군대에서 맺은 모든 인연도 전역과 함께 단절됐다. 유일하게 그와는 연락을 했다. 전역 후 5년 정도 네이트온으로 연말이라거나 서로의 생일에 연락을 주고받았다.


군생활을 하면서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딱히 말을 잘 듣거나 이쁨 받을 후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를 힘든 훈련에서 빼주기도 했고 읍내로 외부 일정이 있을 때 굳이 나를 데려나가서 사제 음식을 사주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었다.

십 년 만에 그런 식으로 나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던 간절함과 용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카톡을 보내기 전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래서 준다는 생각으로 오십만 원을 보내줬다. 만약 더 필요하다고 했다면 더 보내줬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상 그와의 실질적 인연은 군대 제대와 동시에 끝났다. 전역 후 우리의 연락은 실제의 만남은 없이 온라인에서만 이뤄졌다. 군대라는 어려운 환경이 우리의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만들어준 효과를 제외하면 그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를 스쳐간 수많은 인연 중 하나일 뿐이다. 이미 끝났던 인연에게 돈을 빌려줬기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도 더 이상 잃을 인연이 없다.​


애초에 보내주면서 돌려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기대하지 않는다. 빌려준 돈을 받기보다는 그저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그의 인생에, 아니면 적어도 그가 1년 전 나에게 연락해야만 했던 위기를 이겨내는데 도움이 됐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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