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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를정한일 Feb 10. 2022

고두암과 자본주의


수능을 보고 짧게 논술 학원을 다녔다. 논술 학원 수업 시간에 옆에 있던 친구가 웃긴 이야기를 해줬다.


"우리 이모가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까 내원을 하라고 연락이 왔데. 보통 검사 결과가 이상이 없으면 부르지 않는데 병원에 오라고 하니까 겁이 나더래. 그래도 일단 병원을 가셨어. 의사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웠으니까 먼저 의사 선생님 방에 들어가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래. 그러려니 하고 의사 선생님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자리 맞은 편에 앉아서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책상을 봤는데 책상에 있는 서류를 얼핏 봤는데 이모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 '고두암'이라고 적혀있더래. 순간 이모가 고두암을 보고 '아! 내 암이구나... 그래서 불렀구나...!' 싶더래. 순간 온갖 생각이 다 들더래. 심각한 건가? 내가 죽는 건가? 고칠 수 있는 건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두암이라는 게 암을 처음 들어봐서 이게 무슨 암이지? '두'가 들어가니까 머리랑 관련된 건가?"


수업시간이라 친구와 거의 얼굴을 맞대다시피 한 상태에서 심지어 친구가 소곤소곤 거리는 탓에 이야기에 더 몰입이 됐다.


"서류를 들어서 자세히 보려고 하려는데 그 순간에 의사 선생님이 방에 들어오더래. 이모는 선생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먼저 말을 꺼냈데."


이모 : 선생님, 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냥 말씀해주세요.


"의사가 이모 말을 듣더니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더래."


의사 : 네? 무슨 말씀이시죠? 뭘 알고 계시다는 거죠?


"이모는 의사 선생님이 자기를 배려해주려고 연기한다고 생각해서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데."


이모 : 선생님. 저 배려해주신다고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말씀해주세요. 저 많이 아픈 거잖아요. 저 암이잖아요. 저 죽는 거예요? 치료할 수 있어요?


의사 :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암이라니요. 암 걸리셨어요?


이모 : 왜 시치미를 떼세요! 저 암이라고 알려주시려고 부르신 거잖아요. (책상에 있는 서류를 가리키며) 선생님 안 계실 때 봤어요. 고두암! 저 고두암이잖아요!!


"그제야 의사가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모한테 말했데."


의사 : 고두암은 제 이름이에요. 


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고 끄윽끄윽 거리면서 웃었다. 바로 그때! 논술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고베리슬로우!!"


흠칫 놀라면서 선생님을 쳐다봤다. 선생님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네 집 잘 살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잘 못 살아? 너네 집에 무슨 우환 있니?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런데 왜 못 산다고 한 거야?"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잘 산다 못 산다'를 '돈이 많다 없다'와 동의어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누군가가 잘 산다고 하면 그 가정이 행복하다거나 화목하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돈이 많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 어쩌고 저쩌고..."


그날 수업 주제가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였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는 나에게 기습 질문을 했고 나는 그 미끼를 물어버렸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나도 모르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반사적으로 '아니요'라고 답했다는 사실에 두고두고 자존심이 상했다.


"근데 사실.."


선생님한테 한 방 먹고 얼떨떨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까 내가 얘기해준 거, 그거 사실 우리 이모 이야기 아니야."


'응???' 놀라 눈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우리 이모라고 하면 더 재밌잖아."


2004년 12월 어느 날. 친구가 해준 이야기와 선생님의 질문과 마지막 친구의 마무리까지. 하나같이 충격적이었고 2022년 2월, 그 충격을 이 글로 남긴다. 




(*) 가물가물하지만 나중에 친구가 말해준 웃긴 이야기는 컬투에 나온 사연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두암'도 사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최대한 비슷한 느낌으로 지어낸 단어지만 '암'으로 끝나는 단어였던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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