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혹시 저한테 지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안 한 적 있어요?"
후배 P와 함께 점심 먹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사색에 빠져 걷고 있는데 후배가 문득 나한테 물었다.
"동기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자기 팀 선배들한테 지적 같은 걸 많이 받더라고요. 근데 저는 선배님한테 별로 지적받은 게 없는 거 같아서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그렇게 잔소리를 많이 한데요?"
"아, 잔소리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언 정도? 하하하."
P는 잔소리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내가 다른 데 가서 P가 자기 동기들은 잔소리 많이 받는다고 말하고 다닐까 걱정됐나 보다.
"글쎄. 워낙 알아서 잘하니까 별로 없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내 눈에 밟히는 게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거나 내가 널 사랑하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근데 내가 굳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것도 아니고 널 사랑하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당연히 있었겠죠? 제 마음에 안 드는, 안 들기보다는 잔소리를 할까 말까 했던 포인트들이?"
"아 진짜요? 뭐였어요?"
P는 흠칫 놀라면서 자기의 무슨 행동이 거슬렸는지 되물었다.
"진짜 듣고 싶어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어요? 본인이 얼마나 큰 잘 못을 하고 있었는지!!"
"제가... 그렇게 잘 못 하고 있었나요?"
내가 장난치는 걸 알면서도(아마도?) P의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이 섞여 있다. 그런 시답잖은 장난쳐서 미안한데 그런 장난이라도 치지 않으면 별로 후배들이랑 이야기할 게 없기도 하다.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요. 정말 잘 못했으면 그때 바로 말했겠죠. 정말 잔소리 같아서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하지 말자고 하고 넘어갔어요."
속으로 이제 와서 굳이 다시 안 하기로 했던 잔소리를 해줄까, 아니면 그냥 별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하고 넘어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이렇게까지 해놓고 말 안 해주면 더 마음에 둘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두 가지 정도 있는 거 같아요. 하나는 P 씨가 메일을 맺음 짓는 습관 같은 건데, P 씨는 모든 메일의 끝을 질문으로 끝내요. '~ 해주실 수 있나요?', '~에 대한 의견 있으실까요?' 이런 식으로 요. 내가 보기엔 이게 너무 자신 없어 보이는 거예요. '~ 해주세요.', '~에 대한 의견 따로 없으시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대애박. 전 제가 그렇게 하는지 전혀 인지도 못 하고 있었어요. 방금 선배님이 말해주니까 처음 알았어요."
P는 진심으로 처음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놀랐다.
"근데 P 씨 보면, 꼭 메일을 쓸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 약간 그런 자세로 일하잖아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개진하기보다는 상대방이나 같이 일 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지 먼저 파악하고 그리고 최대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처리해주려고 하잖아요. 의견이 다르면 나처럼 칼같이 자르거나 하지 않고 최대한 P 씨 입장에서 중재하려고 하기도 하고. 예전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가 딱 P 씨처럼 일했는데 내가 저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무엇보다 그렇게 해도 P 씨가 일을 알아서 잘 처리하니까. 정말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답답했던 거고, 그걸 뭐라 한다면 그건 정말 잔소리가 되겠구나 싶어서 말 안 하고 넘어갔어요."
"와... 진짜 저는 제가 그러는지 지금 처음 알았어요."
저기, 내 말 듣고 있니? 내가 말하는데 계속 속으로 '내가 정말 그러나?' 생각만 한 건 아니지?
"또 하나 내 눈에 밟힌 게,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 우리 소주 먹는데 제가 소주 따라주는데 P 씨가 소주잔을 기울여서 받았잖아요. 그거 그러면 안돼요."
"진짜요?!?!"
"맥주잔은 기울여도 되는데 소주잔은 기울이면 안 돼요. 그게 주도예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렇데요. 소주잔은 기울이면 안 되고, 소주잔으로 건배할 때 아랫사람의 소주잔이 윗사람의 소주잔보다 높으면 안 되고 뭐 그런 게 있데요."
"와... 진짜 몰랐어요. 이제까지 계속 기울였는데."
"내가 예전에 회사에서 그거 때문에 한 번 잔소리 들었거든요. 저도 처음에 입사하고 얼마 안돼서 어쩌다가 소주진을 기울였는데 어디서 소주잔을 기울이냐고 뭐라 하는 거예요. 어디서 누가 그랬는지는 기억이 이제는 안 나는데 막 혼낸 건 아니지만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큰 소리로 말해줘서 약간 무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건 기억나요. 그래서 나도 P 씨한테 말을 해줄까 말까, 나중에 어디 가서 나처럼 한 소리 들어서 괜히 마음에 흠집 하나 남는 거 아닌가 고민하다가 에이, 별 것도 아닌데 굳이 싫은 소리 하지 말자 하고 넘어갔죠."
P는 약간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충격이라기보다 이제까지 자신이 얼마나 잔을 기울여왔는지 속으로 헤아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거 말고는 딱히 P 씨가 내 눈에 밟히는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지금 당장 생각나지 않거나. 있었어도 내가 말한 것들보다 더 별 거 아니니까 생각 안나는 거 겠죠."
잠시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오래전, 10년도 넘은 에피소드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사실 내가 후배들 앞에서 굳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어릴 때 사고 많이 쳤거든요. 우리 팀이랑 다른 팀이랑 팀대팀 회식하는 날이었어요. 지금은 그런 게 별로 없는데 예전에는 그런 팀원 전원이 참석해서 다른 팀이랑 친목 도모하는 회식이 엄청 많았어요. 그날도 늦게 까지 술을 먹어서 2차였는지 3차였는지 암튼 다들 많이 취해있었어요. 그때는 그냥 술집 안에서 담배 폈거든요. 제가 자리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제 건너편에 있던 팀장이 갑자기 술을 따라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급한 김에 담배를 입에 물고 술잔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그 팀장이 '이 새끼가 지금 입에 담배를 물고 술을 받으려고 해!?' 하면서 쌍욕을 하는 거예요. 내가 당황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하면서 속으로 담배 불 붙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한 두 번 더 빨고 끄고 술을 받아야 생각했어요. 그래서 담배를 한 번 더 피우는데 그 팀장이 '이 미친 새끼야 담배 끄고 술 받아!' 소리를 지르면서 내 싸대기를 때리려고 손을 번쩍 드는 거예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P를 바라봤다. P는 아무 말도 없이 눈으로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싸대기 맞으셨나요?'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어서 그 팀장한테 참으라고 말렸어요. 그래서 싸대기 맞진 않았죠. 솔직히 그때는 내가 미쳤지 생각했어요. 팀장이 술 주렸는데 담배를 입에 물고 받으려고 하다니. 팀장과 신입이라는 걸 떠나서 어쨌든 나보다 스무 살 정도 많은 사람한테 입에 담배를 물고 술을 받으려고 한 거잖아요. 근데 시간이 들고나니 뭐 내가 잘 못한 것도 맞지만 그 팀장 새끼도 절대 어른답지 않은 새끼였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지더라고요.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건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어요. 딱 그날 하루. 딱 그때 한 번이었거든요. 근데 그 팀장 새끼가 아랫사람들한테 쌍욕하고 때리려고 한 건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 끝나고 사무실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무튼 결론은 적어도 저한테는 P 씨는 별로 잔소리할 만한 게 많이 없었다. 나는 예전에 내가 사고 친 게 많아서 후배들한테 상당히 관대한 편이니까 내 앞에서 실수하거나, 내가 딱히 지적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혼자서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주의할 점은 다른 사람들은 보통 나보다 엄격하기 때문에 내가 괜찮다고 해서 꼭 회사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보장할 순 없다. 이 정도 되겠네요."
그날 이후 P랑 술을 먹은 적이 없어서 그가 여전히 소주잔을 기울이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메일의 끝은 항상 질문으로 끝내고 있다. 역시 잔소리는 안 하는 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