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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Nov 17. 2020

아이들과의 놀이.

아이들의 놀이, 어른의 놀이.

몇 년 전, 아마 첫째가 아직도 기어 다니는 아기였을 무렵일 쯤인 것 같다.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에서 한 표현이 나와 나의 지인과의 논쟁(?)을 촉발시킨 적이 있었다. 정작 게시글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무엇 때문에 댓글 논쟁이 벌어졌는지는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그것으로 배운 점이 아주 많이 때문이다. 그 표현은 "내가 가사와 육아일을 [잘 못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뭐 이런 표현에서 모두들 눈치챘다시피, 가사와 육아를 "도와준다"는 개념으로 사용한 나의 무개념을 꼬집는 한 지인의 댓글이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백하게 틀린 표현이다 왜냐면, 도와주다를 사전에 검색해 보면 "남을 위하여 애써주다"라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도움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가사와 육아는 전적으로 아내 한 사람의 일이 아닌 내 일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의 아빠들은 그 개념을 구분은 하면서도 관성적으로 또는 아무래도 미진한 본인의 역할의 크기를 알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도와준다는 표현을 쓰다가 된통 혼나고는 하는데, 나도 그날 그랬다. 하지만 결혼한 여성도 아닌 총각이고 나이도 나보다 어린 지인에게 그런 지적을 받았다는 게 당시 나는 뭔가 억울했고, 사실 화가 났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이 처한 환경과 상황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 등이 있기 마련인데 그 친구의 지적은 나의 그런 상황은 모두 무시하는 것 같았고, 결혼생활이 어떤 건지, 또 대학원생인 그 친구가 외벌이 아빠의 노고를 알지도 못하면서, 또 내가 도와준다고 한 표현 속에 숨어있는 고마움과 미안함의 마음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그 게시글의 요지는 가사분담에 대한 내용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카이스트에 다니는 그 친구에 대한, 그리고 나의 잘못을 올바로 꼬집은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항변을 시작하면서 댓글에 댓글이 달리고 그렇게 주욱 이어지다가, 결국 실제로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가 먼저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난 완벽하게 그 친구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차라리 얼른 인정하고 그 표현을 고쳤으면 내가 이불 킥 할만한 부끄러움은 없었겠지만, 지금의 이 깨달음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날 그렇게 생각했던 핑계야 넘치지만, 가사와 육아에 대한 당시 나의 개념과 그 표현이 결코 옳았다고 볼 수 없기에,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내가 배운 것이 많았고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런 말들을 안 쓰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그 친구는 한 가장을 갱생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얼마 전 또 무의식적으로 이번엔 아내가 내게 말했다.


"여보, 애들이랑 좀 놀아줘."


갑자기 몇 년 전 "가사를 도와주다"가 생각이 나면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에게 내가 놀아주는 게 맞는 것인가? 내가 함께 노는 게 맞는 것인가? 아마 다들 알겠지만, 아이들도 안다, "적당히"놀아주고 있는 것과 진심으로 같이 노는 사람의 차이를. 그리고 진심으로 같이 노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또래를 더 좋아하고, 쌩쌩하고 젊은 삼촌이나 이모를 더 좋아하고, 선생님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놀아주다" 역시 "놀다 + 주다"라고 본다면, 놀이나 재밌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 + 시간 따위를 남에게 허락하여 가지거나 누리게 하다. 즉 나의 시간과 체력을 애들에게 허락하여 (마치 하사하듯이) 놀이나 재밌는 일을 하며 즐겁게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것도 남에게. 참 부끄러웠다. 내가 뭐라고 감히 날 허락해준다는 말인가. 남도 아니고 내 자식들에게. 부모로서, 아빠로서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장본인으로서 당연히, 마땅히 내가 진심으로 함께 놀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성과 행동은 늘 함께 할 수는 없다. 가끔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놀이는, 정말 내가 같이 하기에는 너무 유치하거나, 아니면 너무 수준 차이가 나서 내가 일부로 못하도록 노력해야 하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 예를 들면 숨바꼭질을 하자고 해놓고 숨을 곳이라고는 이불속밖에 없는 게 뻔하다던지, 커튼 뒤에 숨었는데 다리가 다 보인다던지, 어디에 숨었는지 키득거리는 소리다 다 들린다던지. 아니면 갑자기 무슨 뮤지컬을 하겠다며 이상한 동작을 따라 하고 주문 같은 이상한 대사를 무작정 따라 하라고 한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선생님이 되어서 나에게 뭔갈 가르쳐주려고 애쓰는데 이미 내가 다 알거나, 다 틀린 거를 상상해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다던지 같은 일들 말이다. 때로는 내 몸이 너무 지치고 힘든데 아이들은 너무 멀쩡하고 자꾸 뭔가를 하고 싶어 할 때도 있다. 나도 때로는 쉬고 싶다는 개념을 나 말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면 난 늘 놀고 있기 때문이다. ("놀다"의 또 다른 뜻은 "어떤 일을 하다가 일정한 동안을 쉬다."이다)


"주다"는 것은 남에게 건네거나 허락하다는 뜻을 내포하기 있기 때문에 내가 먼저 행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를 더 높이는 표현이 되는 것 같다. 또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은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아이들로만, 즉 나와 지적, 정서적 수준이 많이 차이나는 미숙한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에 언제나 적당히라는 개념이 함께 붙어서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는 느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부모님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딸과 동갑인 손녀를 두신 분이 손녀와의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며 "우리 손녀는 그래서 남편보다 나를 더 좋아해,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같이 베개싸움도 하고 춤도 추고 같이 놀거든." 하셨다.


같이 놀 때는 나도 진심이 된다. 딸과 레고를 만들 때는 나도 진심이 되어서 누가 무슨 색깔에 몇 칸짜리 블록을 써야 할 건지 다투기도 하고, 아들과 공룡놀이를 할 때는 누가 티라노사우르스가 되어서 온 세상 공룡을 다 잡아먹을 것인지 싸우기도 한다. 또 딸과 불어팬이나 글라스데코를 할 때는 서로 여기에 무슨 색을 써야 할지 무슨 의류회사 디자인팀 같은 회의를 하기도 하고, 아들이 스케치북에 출동 슈퍼윙스 캐릭터를 그려달라고 할 때는 한 땀 한 땀 정말 정성껏 지렁이 기어가는 듯 발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을 그려줘도 "정말 똑같다"며 박수까지 쳐주고 또 다른 캐릭터까지 그려달라고 성화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학습지를 잘 풀었을 때, 엄마를 잘 기다렸을 때 등 보상으로 보여주는 애니도 함께 보면서 캐릭터 이름도 외우고, 주제가도 함께 목청껏 불러주고, 누가 무슨 능력과 색상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서 뭘 했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함께 느끼고 공감하며 시청했다.




그랬더니 차량으로 본가와 집을 오가는 시간 동안 (우리는 주말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본가에 가서 지내다가 오는데 편도로 약 한 시간 거리이다) 끊임없이 어디에 나오는 누구는 왜 그런 능력을 쓰며 누구는 왜 이제 더 이상 안 나오는지, 왜 거기서 걔는 그렇게 했어야 하고, 왜 그런 색깔 옷을 입고 있는지, 왜 이름은 그렇게 지었고 어떤 기능들이 있는지 질문을 퍼붓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눈을 감고 잠들어 버리고 나와 아이들은 심각한 토론을 이어간다.


사실 아이들과의 몇몇 놀이는 나도 꽤 재미있게 즐기는 편이다. 다만 아직은 나도 부족한 사람인지라 오글거리는 일부 활동들이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고, 내가 대단히 감사하게도 놀아주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게 만든다. 그런 활동들은 정말 내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나 스스로 허락을 해야 한다. 아니 나 스스로를 타일러야 한다. "네 아이들이야, 넌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자 어서해, 아이들이 기다리잖아." 이제 더 크면 자전거를 함께 탄다던지, 영화를 함께 본다던지, 더 여러 가지 일들과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함께 놀면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 생각이 보이는 것 같고, 아이들이 표현이 부족해서 전달하지 못했던 의미들을 이해하기가 수월해지는 것 같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남자는 다 애"라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애가 맞다. 그래서 장난감을 가지고 같이 노는 게 그나마 제일 재밌다. 물론, 첫째와 둘째가 가지고 놀고 싶은 장난감은 늘 운명처럼 같기 마련이고 항상 중재자로 나서 줘야 한다. 또한 같이 노느라 어질러진 거실은 나 혼자 치워야 하거나, 어질러진 상태 때문에 나 혼자 엄마한테 혼나기도 한다.


오늘도 아들은 장난감을 양손 가득 쥐고 와서 내게 말한다.


"아빠, 이거 같이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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