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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Oct 31. 2020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이제 뭐하고 살 거냐고 물으셨다.

통계청이라고 쓰인 SUV가 농장 앞에 멈춰 서고 두 사람이 내린다. 통계청에서 분기별로 실시하는 "가축 사육 동향 조사"라는 게 있다.

가축 사육을 하는 농가주에게 주로 전화를 해서 무슨 축종의 가축을 몇 월 며칠을 기준으로 몇 수 사육 중인지 묻고 통계자료를 수집하는 일인데, 가끔 정말 그 농장들이 실제로 사육 중인지 즉, 정말 그 기간에 가축이 들어있었는지 실사를 나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 축사관리를 위해 농장 마당에 어슬렁 거리던 나와 마주친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여기가 XXX사장님 농장 아닌가요?"

"네 맞아요."

"아 그럼 저기... 혹시 지금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도 있다.

나의 사업장에 찾아와 놓고는 대뜸 우리 아버지를 찾는다니. 그것도 아버지 지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그냥 통계청 직원들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친절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지금 안 계시지만, 제가 XXX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은 오리 농가주라 함은 기본적으로 50-60대를 기대하고 왔을 것이다.

대부분 은퇴 후 직업으로 하시는 분들도 많고 기존에 몇십 년 하시던 분들도 이제는 나이  드셨기 때문이다. 지금은 2세 경영인들 제법 많아지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직 아무 연고 없이 젊은 청년이 창업으로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든데, 농업이 가지는 지리적인 특징 (시골은 아이들의 병원이나 교육적인 접근이 어렵. 또 여러 문화적인 혜택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리고 어떠한 편견과 섭입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축사는 신축이든 매매든 초기 자본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집이 넉넉한 집 자제인가?' 싶으면서도 '그럼 왜 굳이 농장을?'이런 반응 이라던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농장 하는 사람 치고 상당히 젊구나 특이하네' 이런 반응들이었다.

나는 2014년 4월부터 2020년 5월까지, 정확히 만 6년 동안 육용오리 농장을 경영했었다. 생각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젊은 농장주를 신기해하면서도 정작 큰 관심은 없다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누구나 선망할법한 멋들어진 직업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08년 5월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날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입대 통지서였다. 그래도 딴에는 영어 안 까먹겠다고 카투사를 지원하면서 입대를 연기했다. (당시 카투사는 일 년에 한 번 11월에 컴퓨터 추첨으로 선발했다) 11월에 카투사에 떨어지고 나니 역시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육군이었다. 그런 집착은 때로는 사람을 질리게 하기도 한다. 난 입대도 늦은 주제에 복무기간도 긴 공군에 자원했고, 귀국 후 일 년을 까먹고 2009년 4월 말에서야 입대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도 마냥 부러워할 뿐 전역 후 인생설계를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많게는 6살도 차이나는 후임들 조차 전역 후 교환학생이나 워킹홀리데이 아니면 편입, 또는 토익이나 자격증 공부에 하다못해 배낭여행이나 내일로 패스 여행을 계획할 때도 나는 일단 전역하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함이 컸던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휴가날, 아마 전역이 6개월이 채 남지 않았던 것 같았던 평범한 주말에 아버지와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에 있는 사우나에 갔다. 대뜸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이제 곧 전역이지? 전역 후 계획이 뭐니? 네가 전역하면 내가 결혼했을 때 나인데,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고는 해도 이제 무얼 하고 살 생각이니? 그 정도 계획은 있어야지 않겠니?"


아무 대답도, 계획도, 생각도 없던 내가 부끄럽고 창피하고 무엇보다 죄송했다.

그래도 나름 유통업에 관심이 있었기에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등등의 일을 말씀드리며 대충 계획을 지어내기라도 할까 하다가, 관두고는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게 있기나 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모태신앙이던 나와 누나는 부모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그저 수동적으로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했었다. 고등학교 진학도 내 1 지망은 아버지가 선택하셨고 대학도 부모님이 골라주신 곳으로, 전공도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심지어 군대도 아버지가 정해주신 공군으로....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와서는 나에게 계획이 있냐고 물으시다니. 억울하기도 했지만, 분하기도 했다. 그렇게 끌려만 다니다가 결국 내 손으로 해낸 것 하나 없이 또, 아무 계획도 준비도 없이 사회로 던져지는 게 너무 서글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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