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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Nov 03. 2020

철새가  오는 계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호수에 철새 무리가 까맣게 떠있었다. 철새가 온다는 것은 가을이 깊어진다는 것, 그리고 겨울이 온다는 것.


전화벨이 울린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지만 낯설지 않은 번호. 수신 이력도 제법 많은, 010이 아닌 지역번호가 찍혀있는 "집전화번호"이다. 만약 02로 시작한다면 텔레마케팅이겠거니 하고 무시했겠지만 나는 안다 이 전화는 나의 안부를 애타게 묻는 전화임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오리 안부를 애타게 묻는다.


"안녕하세요, XXX사장님 맞으시죠?

오리 별 이상 없죠? 급이량 이상 없고, 폐사 수 이상 없죠?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목소리는 참 익숙하다. 늘 이맘때면 어김없이 전화해서 조심스럽게 오리 안부를 묻고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는다. 어떤 곳은 젊은 아가씨 목소리, 어디는 중후한 중년 아저씨 목소리, 어디는 친숙한 옆집 이모 목소리. 군청 가축 방역팀,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동물위생시험소, 동물방역과 등등 여기저기서 전화하는데 이름도 다 비슷비슷한 데다가 이름이 중간에 막 바뀌기도 하고 길고 복잡한 이름 한 번만 말해주고, 매번 말해주는데 못 알아듣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대충 "가축, " "방역, " "검역, " "동물, " "위생" 이런 단어가 나오면 그러려니 하고 전화를 받는다.

가장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는 곳은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인데 담당자별로 정해진 지역이 있는지 꽤 오랜 기간 한 분 하고만 통화를 했다. 평상시에한 달에 한 번 정도, 겨울에는 짧으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통화를 해서 정도 많이 들었는지 마지막 통화에서


"제가 이제 사육을 그만뒀습니다."

 

라고 말할 때 둘 다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항상 나에게 '목소리가 젊어 보이는데 젊은 축산인이 농업의 미래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던 마음씨 좋은 누님 마지막 통화에서도 '앞으로 하는 일도 다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응원해 주었다.


회상을 뒤로하고 철새를 다시 바라봤다.

그동안 겨울에는 철새도래지는 나에게 금지였다.

이제 이렇게 지나다닐 수 있다니....

그 말은 이제 "특별방역기간"이 시작되었다는 것.




* A.I.(Avian Influenza, 조류 독감으로 업계에서는 조류독감이 가지는 부정적 어감 때문에 주로 AI라는 표현으로 사용하지만, 독자들은 요즘 한창 떠오르고 있는 A.I. 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과 혼동할 수 있으므로 내 글에서는 아쉽지만 "조류독감"이라고 표현하기로 하겠다)


"특별방역기간"은 말 그대로 방역을 특별히 더 철저히 해야 하는 기간인데 가금농장에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조류독감을 차단하고 예방하기 위해서 지정해 놓은 기간이. 기간은 보통 11월 1일부터 2월 말일까지이나 오리 사육 기간을 고려해서 10월 중순부터 적용받기도 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지자체와 중앙부처까지 최대 대여섯 기관의 "관리"를 받으며,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처벌은 물론 보상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농가들의 참여율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방역기간의 수칙은 매년 발전되고 바뀌기 때문에 (즉 사육 규제가 갈수록 심해졌다는 말이다) 올해는 어떤 규칙이 더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매일 소독과 출입기록부 작성, 필수 차량 (사료, 깔짚, 난방유 등) 외 축산 시설 출입금지 그리고 사육 시작 전 실사 점검, 사육기간 중간의 폐사체 샘플 검수(1차, 2차 최대 2번이나) 그리고 출하 전 생체 검사 (코로나나 독감 확진검사처럼 오리 목구멍에 면봉을 쑤셔 넣어 바이러스 검체 채취를 한다) 그리고 출하 후 농장이 비었는지 실사 검사 등이 있었다. 사육 중간중에 위에 말한 것처럼 갖가지 기관에서 전화를 걸어 오리 상태에 관해 예찰 전화도 한다. 이동제한 시기에는 실제 농장에 있는지 확인 전화를 하기도 한다. 또 지역에 따라 사육 위험지역은 휴지기 제도 (사육을 하지 않고 쉬는 대신 사육 휴업분에 대하여 일부분의 보상금을 지급해 주는 제도)장려했다. 


소독하는 장면도 사진으로 찍어서 지자체나 오리를 납품하는 계열화 회사에 보고했어야 하고 각종 기관에서 실사나 점검을 나오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방역기기의 작동 여부, CCTV 작동 여부, 방역일지 및 출입 관리기록부 작성 여부 그리고 소독약의 유효기간의 유효성 여부였다. (아마 코로나 19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를 꼽으라면 오리농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농가주들은 철새도래지는 물론 철새가 지나가기라도 하는 곳으로 의심되는 인근 하천, 저수지 등의 방문은 물론 크리스마스, 설날에도 가급적 가족, 친지 방문을 자제하라고 했다, 또 농장 인근 지역에서 야생조류 분변에서 항체가 검출되면 반경을 몇 킬로미터 묶어서 사료차 외에는 아무것도 지나다닐 수도 없도록 했으니 코로나 19 시대의 사회적 거리두기 연습을 미리 몇 년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쩐지 사회적 거리두기가 그렇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더라니...)


오리를 출하하고 나면 14일의 의무소독기간도 있었는데 그럴 때 부모님과 골프를 치러가기도 했었다. 골프장 해저드에서 유유히 떠다니던 오리 몇 마리라도 보면 그렇게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던 때가 있었더랬다.




사우나에서의 어색한 부자간의 대화를 끝내고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날 안방으로 부르셔서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다. 오래돼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이 "청년 창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전문직, 대기업, 공무원, 중소기업, 그리고 창업 시 예상 수입과 지출 그리고 은퇴 후 예상 예금과 소득에 대하여 나름의 근거를 들어 설명해 놓은 하나의 표였다.

당연히 전문직이 가장 좋았으나 이미 대학에서부터 정해지는 전문직종의 특성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고, 그 외에는 그 표를 작성한 사람의 의도대로 창업이 (실패의 위험만 뺀다면) 가장 노후까지 안정적인 선택지였다.


아버지는 다른 종이를 한 장 내보이셨는데 그 종이에는 지금 현재 위탁육용 오리 농장의 수당 사육비 지급 내역과 일 년 평균 수입 그리고 규모에 따른 일 년 예상 수익이 적혀있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는 무슨 시장이든지 폭발적 성장기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그 수익지를 보여주셨던 2010년에서 2011년은 우리나라 오리 산업의 폭발적 성장기였고 그 종이에 적혀있던 평균 사육비는 오리 한 마리당 1680원, 최고 수익은 2000원이 넘어갔었다.

즉 한 농장이 오리를 한 번에 만 마리만 키울 수 있다고 해도 한번 출하할 때 최소 1천700여만 원, 그때는 순환 사육 (육성동에서 성오리를 키우는 동안 입추장에서 새끼오리를 같이 키우는 것)이 가능할 때라 연 최고 11회전의 사육이 가능해서 연매출이 이론적으로 거의 2억에 가까운 (오리 농장이 1 만수 규모면 당시에는 중형, 지금은 소형 농장이다)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에 2015년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워낙에 고차원의 예술적 영화라 나는 보지 못했지만 제목이 특이하고 여러 가지로 적용 가능해서 자주 인용된다. 특히 어떤 사람이 과거의 말이나 입장을 번복하거나 이익에 따라서 모순된 행동을 할 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바로 내 상황이 그랬다. 그때는 누가 봐도 오리농장이 맞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주 커다란 함정이 두 가지나 숨어있었다. 바로 내가 오리농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함정이.


첫 번째 함정은 바로 "그때"라는 것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때는 오리산업의 폭발적 성장기였고 기업들은 오리고기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기업들 마다 스포츠 에이전트들처럼 시설 좋고 실력 있는 농장들을 "영입"해야 했고 사육비에는 프리미엄이 자꾸 붙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또 방역정책이 해마다 바뀌면서 시설 조건도 달라지고, 순환 사육도 금지되면서 일 년에 최대 6회전이 전부가 되었다. 이미 사육의 회전수만으로도 수입이 반으로 줄은 셈인데, 내가 농장을 그만둘 때 즈음에는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사육비마저 반토막이었다. 2억 예상의 매출은 5천도 힘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두 번째 함정을 보기 전에 다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으로 가보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일부로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네이버에 영어 제목은 <Right Now, Wrong Then>이다. 다르게 읽으면 "바로 지금, 틀리 고난 다음"으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내 상황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선택을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 일단 틀렸다. 사실 틀렸다는 것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그런 거다. (즉,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이름 모를 사람이 작성한 표가 틀렸다는 말) 내가 얻은 경험, 가치, 용기 그리고 지혜는 말도 못 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틀리 고난 다음, 오답노트를 보면서 공부를 다시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주저앉아서 왜 내가 공부한 것이 시험에 나오지 않았을까 자책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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