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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Nov 05. 2020

연필로 쓰기.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정말 늦은 것일까?

* 나는 "연필로 쓰기"란 표현을 김훈 작가님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 (2019. 문학동네)에서 처음 보았으나, 김훈 작가님은 책의 처음에서 정진규 시인의 시 제목임을 밝히고 있다.

그럼 이건 시의 제목인가 산문집의 제목인가 아니면 그냥 내 글쓰기 스타일인가.


내 연필 사랑은 처음에 딸아이에게 한글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적당한 연필을 사려다가 스테들러 옐로 펜슬 134 HB를 한 타 (한 다스, 12자루) 사면서 시작되었다. '역시 연필은 노란 연필이지, 그래 이왕이면 지우개도 있어야지.' 어찌나 부드럽고 진하 날 또다시 학생이 된 그런 기분으로 인도해주던지.

'그런데 연필 파버 카스텔 사가 좋다며?'

또 한 타 구매. 시골에 사는 나는 도시의 큰 문구사나 화방에 가면 조금 비싸더라도 다양한 연필을 낱자루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낱자루로 살 수 있는 연필은 이들이 미술시간에 쓰는 4B연필 두세 종류뿐이었다.


그렇게 연필을 두어 타 사서 써보다가 운명의 책을 만났다. 바로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정희재. 2014 예담)이었다. 표지에 쓰여있는 연필 테라피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 치유받는 느낌을 쭉 받다가 마지막에 지름신도 받았다. 책은 내가 알지 못하던 연필의 세계로 날 인도했고 그 책에서 나오는 연필들을 찾아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다.


연필은 필기할 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영혼을 위로해 준다는 것 말고도 깎을 때 그 진가가 나타난다. 대부분 연필로 글 쓰는 작가들의 공통된 설명은 연필을 깎으며 손도 쉬고, 생각도 다듬고 글의 정리에 도움이 된다는 식인데, 나는 약간 포인트가 다르다.


사람은 아는 대로 보이기 때문인 듯싶다. 휴대용 연필깎이는 그 원리가 대패와 비슷해서인지 연필을 깎으면 연필 나무를 저미며 부채꼴의 (나무가 좋다면 끊기지 않는 긴 면발 같기도 하고 비단 같기도 한) 대팻밥을 만들어내며 연필심과 나무를 뾰족이 깎아낸다. 그때 그 나무의 질감과 연필깎이 칼날의 예리함 같은, 내가 쓰는 도구의 질감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좋고, 무엇보다 살짝 풍기는 나무향이 좋다. 잘 잘라져 나온, 마치 로키산맥의 대 산림 속 같은 향기 나는 대팻밥을 보면, 헨리 페트로스키가 1989년에 쓰고 1997년 그리고 2020년 개정되어 나온, <연필-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번역 홍성림. 서해문집)에 나오는 대로 연필 나무의 최고봉인 미국산 적삼나무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가 책을 쓴 1989년에 이미 미국산 삼나무는 너무 비싸서 대체 나무에 화학처리로 색상과 향기를 입힌다고 했으니 그럴리는 없다.)




대팻밥을 네이버에 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사전 설명이 "대패질할 때 깎여 나오는 얇은 나무오리"다. 그러니 오리가 얼마나 좋아겠는가. 오리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을 축사에서 편히 쉬게 해 주려면 "깔짚"을 깔아주어야 한다. 내가 직접 가 본 독일이나 네덜란드 오리 축사에서는 정말 밀짚을 깔짚으로 깔아주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리 축사에 보통 왕겨, 톱밥, 대팻밥 이 세 가지를 가장 많이 쓰며 종종 톱밥과 대팻밥을 섞어 그냥 톱밥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기도 한다.

 

왕겨는 초기에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나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예전에 톱밥 수급이 어려워져서 두어 번 써본 적이 있었는데, 가볍고, 보관이 용이하고, 작업이 편하고,  당시만 해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왕겨의 혼용률이 높으면 비료회사가 수거를 안 해가서 처리가 어렵거나 비용이 따로 든다는 점, 다른 깔집 종류보다 자주 깔아줘야 한다는 점, 왕겨의 낱알이 오리털 사이사이에 묻어서 출하 시 오리가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의 단점이 있다.


톱밥은 말 그대로 나무를 톱으로 갈아서 굵은 가루 형태로 오는데 질이 좋은 톱밥의 경우 향기가 좋고, 가루가 굵어서 수분 흡수가 잘되고 오리털의 오염을 잘 제거해 줄 뿐 아니라, 살포기가 있다면 작업도 용이하다.

하지만 사육 분량 치 톱밥을 미리 보관하기가 어렵고, 좋은 톱밥을 구하는 게 쉽지 않으며, 겨울철에는 나무가 머금는 습기가 얼어서 큰 톱날 작업이 안되기 때문에 굵은 톱밥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러면 톱밥 사용이 더 많아지게 되므로 비용이 상승한다.

톱밥은 굵기, 그리고 재료에 따라 가격차이가 나기도 했는데, 폐가구를 많이 사용한 경우는 나쁜 성분의 유입 가능성이 있어서 공급자를 잘 믿어야 한다.


내가 가장 선호한 깔짚은 역시 대팻밥이었다. 우리나라는 나무가 귀한 나라라서 그런지 조각이 얇고 넓으며 큰 대팻밥은 거의 수입산이었다.

수입산 대팻밥은 원산지나 수분 함량에 따라 가격차이가 나는데 수분 함량이 너무 적으면 나무 벽돌 형태로 톤백에 담겨온 대팻밥을 사용 가능하게 다시 분쇄하는 작업이 추가로 요했다.

그러나 다시 분쇄해서 포대에 소분해 놓을 경우  보관과 사용이 간편하다는 장점과 추가 노동력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다.  

질 좋은 대팻밥은 수분을 잘 흡수하고 축사의 냄새를 잘 잡아주고, 오리의 외관을 깨끗하게 해 주며, 같은 효과를 내는데 들어가는 양이 다른 두 종류보다 적게 들어간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고, 품질이 일정하면서 안정적인 수입 루트를 확보한 업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품질이 들쭉날쭉하거나 확보한 물량이 달려서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작업할 때 미세먼지가 많이 나서 환기와 고성능 마스크가 필수인데 그래서 겨울에는 작업이 까다롭기도 하다. 어쨌든 방진 마스크는 많이 쟁여놓고 또 많이 사용해 보았으니 이러나저러나 나는 코로나 19의 대비를 확실하게 하고 있었던 듯하다.

 

기본적인 깔짚만 보더라도 농장 경영은 (아마 모든 경영이라는 것이 다 그렇겠지만) 비교와 연구 그리고 선택의 연속이었다.

비용과 노동력을 비교하고, 수급의 가능과 불가능을 따져보거나, 효율과 사육성적 등을 따져보는 등 상당한 연구와 공부 그리고 정보가 필요했다.

일부 농가주들은 끊임없이 계절별로, 온도나 날씨별로, 깔짚의 종류별로, 깔집의 구입경로별로, 사료별로, 사료 첨가제 별로, 사료의 단계별 급이의 시기별로, 온도 조절의 시기나, 분동 (병아리동에서 육성동으로 나누어 옮기는 것) 일령별로의 성적과 효율, 비용 등을 따져보고 기록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연구했는데, 확실히 그런 농가의 사육 성적이 안정되게 좋고, 사육비도 많이 지급받았다.


지금도 나는 연필을 깎을 때마다 나오는 대팻밥을 보며 오리장에 깔아주면 좋을까를 생각해 본다. 흑연도 결국 광물이니 미네랄이 풍부하지 않을까? 이 연필의 나무는 유난히 질기며 잘 찢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잘 잘리는데 수분은 잘 흡수할까? 아마 한 10년 정도 모으면 한동에 한 번이라도 뿌려줄 수 있으려나?




다시 오리 농장을 선택하게 된 시점으로 넘어가서 나에게는 아직도 두 번째 함정이 남아있었다. 두 번째이자 가장 큰 함정,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일단, 독립을 하고 싶어도 당시 대부분의 대기업 공채는 전반기 하반기에 나누어져 있으며 서류 접수하는 기간이 거의 비슷하게 정해져 있고 그게 대부분 학기가 끝날 때쯤 무렵이며 졸업자보다는 졸업 "예정자"를 선호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떻게든 졸업을 미루며 스펙을 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었다.  취업 시스템을 전혀 알지 못했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기업들이 인재들을 채용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정보도 없었다. 내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내었을 때는 이미 기간이 많이 늦어져서 다시 반년을 또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들이었다. 25개월이나 되는 아니 그 시점에서는 20여 개월이나 되는 군생활 동안 그저 수동적으로 안에서 시키는 일에나 열중하면서 그냥 내려다 보이는 서울시내의 전경에 감탄이나 하면서 그렇게 시간만 보냈던 것이다.


나는 이미 졸업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국방의 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펙이라고 부를 만한 경력도 하나 없는 백수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의 전역예정일은 뭘 해보기도 애매한 5월 말이었다.

그동안 서류 전형에서부터 떨어지는 친구들 선•후배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많이 잃기도 했고, 그런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취업전선에 뛰어들 용기도 없었다. 난 그렇게 절박해져 본 적이 없는 겁쟁이였다. 


입대하는 날부터 주변을 바라볼 때마다 온통 나를 옥죄던 단 하나의 생각은 '난 너무 늦었다'는것 뿐이었다. 훈련소에서 매일 하는 구보에서도 네댓 살 어린 친구들이 훨씬 잘 달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복무한 부대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산 꼭대기의 한 사이트 (소규모 방공 또는 레이더 부대)였다. 서울시내와 가깝고 지하철로도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에 (20여분 약수터 등산을 해야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서울에 살거나 서울권 대학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서울대 재학생들도 심심치 않게 보기도 했고 소위 말하는 각종 인 서울대학 재학생들에, 나 같은 유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 같은 늦깎이 병사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복학"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들이었지 취업이나 복직을 고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편제상 중위들이 많았는데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린 중위들이 대위(진)이 되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난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아무런 목표나 결정된 진로 하나 없이 다시 사회로 나가는 것은 너무나 부담되고 무서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9살에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보다도 병장으로 진급하면서 전역에 대해 겪었던 스트레스가 더 심했던 것 같다. (병장 진급 후 7개월 후가 전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단 다시 사회로 나가면 이제는 정말 학생도, 군인도 아닌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다 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고, 나는 유학까지 다녀온 유복한 가정의 자녀로서 가져야 하는 어떤 책임감이나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도 있었다.


남들에게 반드시 그럴 듯 해 보이는 직업을 가지고 꽤 대단한 수입을 챙기며 현숙한 미녀를 아내로 맞아 총명한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뭐 그러한, 일종의 책임을 짊어진듯한 압박을 받았다. 마치 부모님을 비롯한 모두가 "당연히" 내게 그런 것들을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들을 보내는 것 같았고 휴가 때마다 마주치는 친지들의 "이제 뭐할 꺼니?"라는 질문이 가장 두렵고 진땀 나는 질문이었다. 왜냐면 내게는 충분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내가 가는 길(그 길도 없었지만)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얼른 그냥 정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냥 빨리 어떻게는 나도 전역 후 이렇게 할 일이 있다는 걸 정해두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나 스스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겁쟁이였고 조금은 안일했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보다는 조급함이 먼저였던 이유가.


참고로 내 글은 결코 어떤 이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신실함과 성실함,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다른 청년들이 잘하지 않는 분야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의 영웅적 스토리가 아니다. 처음 글에서 밝혔듯이 난 결국 농장을 정리했고 그 과정들 속에서 내 경험과 느낌들이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누군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그냥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쓰는 나의 농장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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