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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곰돌이 Dec 03. 2020

난 내 동생이 정말 싫어!

과연 둘째의 마음은.

요즘 부쩍 둘째가 누나를 괴롭힌다.


그럴 때마다 첫째는 울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나는 XXX이 너무 싫어!!"




"나는 동생이 너무 싫어!"

"동생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저런 동생 버리고 싶어!"

"동생 이름도 지워버리고 싶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말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어디서 연습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콤보로 내뱉는 말은 처음에는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서글펐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저렇게 서로를 미워해야 하다니.


물론 둘째가 먼저 잘못을 한다. 그것도 일부로. 누나의 그림을 망치고, 소꿉놀이를 방해하고, 인형을 숨겨놓고, 누나가 가지고 놀려는 건 무조건 빼앗거나 던져버린다. 누나가 읽으려던 책도 뺏어와 자기가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누나가 착한 일 해서 보상으로 받은 TV 시청권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자고 고집을 부린다. 누나가 화장실에서 집중하고 있을 때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부산스럽게 한다.


때리고 아프게 하는 건 별로 없는데 누나가 짜증 내는 일만 골라서 사람을 약 올린다. 그리고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도, 막상 누나가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면 금세 주눅이 들어서는 혼자 얌전히 앉아 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얼마나 연민을 느끼게 하는 표정과 몸짓인지, 아무리 둘째가 먼저 괴롭힌 걸 알아도 측은한 마음에 화를 낼 수도, 혼을 낼 수도 없게 만든다.




처음에는 어떻게 첫째를 달래줄까 생각했다. 첫째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기면 다가가 안아주면서 다독여주고 양보해주어서 고맙다고, 누나라서 이제 제법 나눠 쓸 줄도 알게 되었다며 칭찬도 해주었다. 그리고 항상 말해주었다. "동생은 너랑 함께 놀고 싶어서,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둘째는 관심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누나를 질투하는 것 같았고, 이제 제법 자기주장이 발달할 나이니까 둘째가 고집도 피우고, 떼도 부리고, 남자아이라서 장난이 심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라 생각했다. 두 아이들을 잘 다독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과연 이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부모나 형제가 자신들을 어떻게 대한다고 생각할까? 형제들은 도대체 왜 질투하는 걸까?  '내가 더' 부모한테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어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서?


나는 "왜" 누나를 질투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제는 왜 그랬는지 별다른 기억도 없다. 그냥 부모님의 대우가 불공평하게 느껴졌었고 같은 양의 관심을, 시간을, 사랑을 받고 싶었다. 과연 '같은 양'이란 게 내가 알 수나 있었을 것이며, 정말 내가 공평한, 같은 양 만을 바랐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이라는 게 정량적인 개념으로 표현하거나 측량할 수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가능하지 않은걸 바랐으니 얻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누나를 가장 질투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20년도 더 전에 누나는 예술고등학교를 다녔다. 방과 후나 주말에도 전공과 관련해서 교수님들이나 강사님들을 찾아다니며 개인 레슨을 받았어야 했는데, 항상 엄마와 함께 다녔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그 흔한 중 2병도 집에서 부리지 못했다. 집에는 내 사춘기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둘째도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아니라 누나가 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창의적이고 색감이 좋은 첫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사실 본래 실력을 떠나서 원래 그 나이 아이들은 아무거나 그려도 칭찬을 받기 마련이지만, 둘째의 눈에는 달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렇게 그릴 수 없으니까.


또 누나는 책을 읽고 나면 아빠와 사고력 토론도 하고 아빠 무릎에 앉아 한참이나 대화를 하는데 자신은 말이 짧아서 대화에 끼지 못하니 그것 또한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글을 거의 다 읽을 줄 아는 첫째는 이제 혼자서도 독서가 가능한데 그것 또한 얼마나 부러울까.


결정적으로 첫째가 유치원에서 하원 하면 월, 화, 수 3일간은 근처에 있는 혁신도시에 가서 미술놀이나 창의력 수업을 듣게 해 준다. 우리가 사는 곳까지 통원차량을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데려다주고 활동이 끝나기까지 50분에서 한 시간여를 근처 카페에서 기다렸다가 데리고 오는데, 그동안 둘째는 외갓집에서 엄마, 아빠,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20년 전에 엄마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중학생이던 나도 그게 싫었는데, 이제 3살인 아기가 얼마나 그게 싫었을지,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당연하게 워낙 외할머니와 친하니까 둘째도 마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감정에 작은 상처가 곪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나는 알아줬어야 한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심지어 지금 이 생각도 첫째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하고 있는 생각이다!


첫째가 "난 내 동생이 정말 싫어!" 

하고 외치고 있을 때,

둘째는 "난 혼자서 기다리는 게 

정말 싫어!"하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둘째를 꼭 안아주려고 했건만 엄마를 찾아서 뽈뽈 뛰어가 버렸다. 그리고 한 시간을 엄마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아이를 보며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사실 둘째를 가질 계획을 세울 때에도 우리 부부는 '과연 우리가 두 아이에게 똑같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하고 둘째는 태어났지만, 애초에 이런 문제에 답이 있을까?


자녀들을 향한 내 사랑이 항상 정확히 같다고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도 사람이고 그때그때의 감정과, 오늘 같이 내 경험과, 여러 가지 상황이 더해지면 그때마다 더 마음 가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떤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다른 거지, 둘 중 어느 하나를 더 챙기고 더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다 그러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상처 받았다고 목놓아 외쳤어도 우리 부모님은 늘 똑같이 대한다는 기계적인 대답뿐이었고, 그것이 더 나를 상처 받게 했었다. 결국 달라지는 행동도, 말도, 태도도 없었다. 난 늘 내가 받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누나도 누나가 받는 게 부족하다고 느꼈다.


아이의 시선에서 똑같이 느껴보기는 어렵겠지만, 가능한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아이가 진짜 느끼는 마음이 무엇일까. 아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나의 어떤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정말 위로가 되는 걸까? 그리고 진짜 내가 보듬어 줄 수 있는 상처는, 내가 진짜 감싸주고 안아주어야 할 아픔은 무엇일까?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아빠의 역할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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