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서적을 읽은 아빠의 최후
다행이라면 나는 5년의 유학생활로 회화를 배우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 아이들은 항상 문제 상황을 만들었으므로 책을 읽고 있는 중간에도 책에서 배운 회화를 써먹어볼 기회가 생겼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둘째 아이는 누나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뺏으려고 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의 개념을 먼저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Chapter 2. No. 30 네 것 맞아 p.95) 그래서 책에 쓰여있는 대로 말해주었다.
"[둘째]아 이건 누나 거야. 누나한테 빌려달라고 해볼까?"
"누나, 빌려줄래?"
"싫어!!!!!"
"우에엥!!"
우는 둘째를 안아주며 토닥였다.
"누나 건데 누나가 빌려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다시 부탁해보자. 지금은 다른 거 가지고 놀아볼까?"
"싫은데..... 저거 가지고 놀고 싶은데...."
"그렇치만 저건 누나 거야."
아직 만 36개월도 안된 둘째가 바로 이해가 될 리 없다. 둘째는 다시 손을 뻗어 누나의 손에 든 장난감을 가로채려 했고 누나는 있는 힘껏 자기 머리 위로 장난감을 들어버렸다. 졸지에 첫째 아이만 손들고 벌서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둘째]아 저건 누나 거야. 가지고 놀고 싶으면 누나한테 부탁해야 돼."
"싫어! 내 거야!"
"아니야 [둘째]이 거는 여기 아빠가 이거 사줬네, 이거로 아빠랑 같이 놀자 그럼."
"저거 할 거야. 누나 들고 있는 거."
"안돼!! 내 거야!!! 싫어!! 절대 안 돼!!!"
아내의 말대로 육아책을 읽은 것을 후회했다. 책에서 오은영 박사님은 말했다. 육아 회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절대 화내지 말고, 아이들이랑 같이 싸우지 말고, 몇 번이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욱! 화가 치미는 순간 15초만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처음부터 말하라고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읽었다. 괜히 읽었어. 그냥 소리 지르고 싶다. 다 뺏어버리고 싶다. 그냥 들어가서 자라고 하고 싶다.'
어느 정도 진정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내가 진정할 동안 여전히 첫째는 둘째가 장난감을 빼앗지 못하게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뭔가 짠하고 웃겼다.
네 번 정도 반복했을까 드디어 둘째가 포기하고 나에게 안기며 말했다.
"아빠, 그러면 똑같은 거 사주세요."
"똑같은걸 또 사는 것보다는, 누나도 [둘째]이 꺼 중에서 가지고 놀고 싶은 게 있을 거야 그럴 때 둘이 사이좋게 바꾸어서 같이 놀면 돼. 그냥 지금 누나 마음이 저걸 안 빌려주고 싶은 거뿐이야. 아빠랑 다른 거로 놀자."
그렇게 포기하고 돌아서는 둘째에게 갑자기 첫째 아이가 제 손에 들고 있던 문제의 장난감을 턱 쥐어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도 놀라고 둘째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다음 수칙을 기억했다.
"[첫째]이가 동생이랑 장난감도 같이 나눠 놀고, 대단해." 칭찬해주었다.
그러자 둘째도, "누나 고마워"하며 장난감을 들고 날아가 버렸다.
부모에게 소유권을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이제 둘째가 가지고 논다고 해도 아빠는 이게 내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걱정이 없다는 마음이 들은 건지, 그냥 누군가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알아준 게 좋았던 건지 두 아이들은 이후로 그 장난감과 다른 장난감들을 사이좋게 가지고 놀으며 잘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놀이에 열중했다.
비록, 나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뻔했지만, 아이들이 잘 어울려 노는 것을 보면서 '역시는 역시다'라고 느꼈다. 왜 요즘 이 박사님이 그렇게 유명한지, 효험을 제대로 느꼈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읽고 자꾸 배워야 하는 것인가 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오은영 박사님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을, 우리는 정작 아이들 때문에 볼 수가 없다. 애먼 우리 어머니만 열심히 보시고는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워서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시고는 한다.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는, 우리 첫째는 정말, 아주 그리고 매우 예민한 아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냥 첫째가 똑똑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예민하기도 했다. 각 챕터와 상황에서 "예민한 아이의 경우, " "가끔 예민한 아이들은, " "예민할수록, " 따위의 예시로 시작하는 모든 문제의 상황들과 아이의 반응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첫째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문제들이다. 즉 서두에서 내가 아내에게 한 말이 옳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육아책을 읽을 때 아내가 자괴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우리 아이는 일반적이지 않고 아주 예민한 아이 었으니 일반적인 반응을 보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예민하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도 세심하게 대해주면 될 것 같다.
둘째는, 자괴감이 들것이라는 아내의 우려와 달리 나는 자신감이 들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3분의 1은 초등생이나, 사춘기 아이에게 해주는 말이니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내가 이미 잘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었으니 나는 3분의 1만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역시 나는 "말로 하는 육아"가 체질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왜" 아이가 그렇게 느꼈는지를 살피는 것과, 그리고 아이의 표현이 아이의 모든 생각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은 계속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아,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그랬구나.' 간지럽던 생각들이 명쾌해지기도 했고, 나는 나름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실제로 달라지는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충분히 따뜻한 대화만으로도 (소리 지르고, 따지고, 화내지 않고도) 아이들의 행동을 바꿔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다만 인내심이 아주...... 아주 많이 필요하다.
분만대에 누워서 첫째는 2시간 반 만에, 둘째는 19분 만에 자연 분만한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문제 상황에서 인내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기다리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이른 시기에 뒤집었고, 앉았고, 걸었고, 뛰었다. 첫째는 당연하고 둘째도 남자아이임에도 두 돌 전에 말을 했다. 늘 빠른 아이들이었기에 우리도 모르게 당연한 기준들이 높아졌고 기대치가 높아졌던 것 같다.
아이들을 아이들로 인정해주고 기다려주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것." 늘 곁에서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리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 오늘 아빠의 역할이라는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