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신으로 정신없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씻고 나와보니 아내와 딸이 부둥켜안고 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우리 딸이 나한테 삐쳤어."
요즘 부쩍 자신의 감정상태, 그중에서도 화나거나 삐친 상태를 온몸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만 5세 (62개월)의 딸은 이제 기분이 안 좋으면 혼자 방에 들어가 벽을 보고 앉아서 누군가 들어줄 때까지 "나 화났어!"를 외친다.
나는 홀로 거실에서 놀고 있는 둘째의 옷을 입혀주며 온 감각을 집중해서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가 그러니까 내 목소리도 이렇게 나오잖아.
나도 원래 내 목소리로 말하고 싶단 말이야.
나도 기분이 나빠, 상처 받는단 말이야.
엄마가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이제 엄마랑 말 안 할 거야."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아마도 집안을 정리하랴, 애들 챙기랴, 외출 준비하랴 정신없이 바쁜 아내가 아이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거나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아친 모양이다. 둘째의 준비를 끝내고 공룡으로 조금 놀아준 뒤 나도 옷을 갈아입고 다시 양치를 하고 있었다.
첫째가 뛰어와 말했다.
"아빠, 종이접기 색종이 챙겨야 돼."
물소리와 양치 소리 때문에 잘 듣지 못한 나는 거울에 비친 아이가 아니라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아빠가 지금은 양치 중이라 잘 못 들었는데, 금방 끝내고 나가서 도와줄게."
"네!"
밝고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는 거실에서 동생과 놀기 시작했다. 아내가 조금 억울하다는 듯이 첫째에게 물었다.
"너 왜 아빠한테는 서운하다고 안 해?"
"아빠는,
내 눈을 보고 이야기해줬거든,
그래서 아빠가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내가 알아
그래서 괜찮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단둘이 있을 때 살짝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딸내미는 아까 왜 화난 거야?"
"아니, 내가 설거지하는데 옆에서 "엄마 종이접기 색종이 챙겼어?" 물어보길래 "응, 챙겼어" 대답했는데, 자꾸 "챙겼어?" "챙겼냐고!""엄마! 엄마!" 부르잖아 그래서 "아 챙겼다니까!" 하고 소리 질렀지. 그랬더니 "엄마 왜 그렇게 말해? 꼭 OO이가 말하는 거 같아."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더라고."
요즘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문제가 있는지 부쩍 한, 두 아이들의 이름을 말하며 자신과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을 쳐다보지 않으며 건성으로 말한다거나, 같이 안 논다고 한다거나 등의 말을 자주 하길래 담임선생님과 상담도 했더랬다.
아이의 담임선생님께서는 일부 감정 발달이 빠른 여자아이들 경우 작고 사소한 것에 삐쳐서 오늘은 A가 B에게 나 너랑 안 놀아, 내일은 B가 C에게 나 너랑 안 놀아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 너무 걱정하시지는 말되 본인도 조금 더 세심히 아이들을 관찰해 보시겠다는 대답을 듣고 어떻게 아이를 달래주면 좋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아이에게 친구들과의 갈등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르쳐야 그런 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유치원이라는 첫 사회생활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인식해서 앞으로 인생에서 마주할 수많은 인간관계들을 유연하고 의연하게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겨주었다.
저번 편에서도 참조한 오은영 박사님의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2020 김영사>도 참고해서 "다음에 놀 수 있으면 놀자."의 말도 가르쳐 주고 (Chapter 5, No.97 에이,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지), 이번 기회에 그동안 어울려보지 않은 다른 친구들의 매력을 찾아보자며 다른 친구들과 놀아볼 것도 유도해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떤 남자애랑 잘 언급하지 않던 여자애의 이름을 언급하며 잘 놀았다고 하더니 요즘은 또 자꾸 혼자서 논다기에 너무 걱정돼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코로나 때문에 무조건 한 명씩 떨어져서 놀아야 한다'라고 했다. 아이가 친한 친구들과 소원해지길래 걱정했더니 이놈의 질병이 아예 모든 아이들을 따로 떨어트려놓은 관계 하향평준화를 이루어내 버렸다.
딸의 대답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빠는 내 눈을 보고 말해줬거든."
정말 사소한 행동, 의도하지 않은 작은 행동 하나가 그 아이에게는 친구와, 엄마에게 받은 서운함을 위로해 주었다. 제 녀석도 평소에는 대답도 잘 안 하고 잘 쳐다보지도 않더니, 원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아빠의 귀 기울임을.
어쩌면, 아이는 어떤 대답이나 행동, 문제의 해결보다도 '바라봐 준다는 것'을 더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바라봐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안정감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서 귀찮게 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스쳐가는 작은 바람결 같은 부름에도 대답해주어야지. 별거 아닌 시답잖은 부름에도 대답해주어야지. 그리고 눈을 바라봐 주어야지. 부르지 않아도 내 시선이 아이를 먼저 향해 있어야지. 혼낼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 더 많이 눈을 바라보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지. 눈으로 말해 줘야지 '아빠가 너희들을 정말 사랑해.'
간단하지만 용기가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고 진심이 필요한 눈 맞춤. 우리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눈빛을 보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