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을 먹고 남편과 함께 달빛공원 수변로를 따라 산책하고 있는데, 분만예정일이 1달 남은 임신 중인 딸에게서 10분, 5분 간격으로 전화가 왔다. 밤 10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비상 상황이 온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유사시에 대비해 출산 입원 준비를 해서 가방을 다 싸놓고 있어. 엄마 아빠가 최대한 빨리 갈게.”
가던 길을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와서 급히 가방을 싸고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8월 초라 날씨가 무더운데 연료 계기판을 보니 주유는 하고 가야겠기에 주유소 쪽으로 차 방향을 돌리니, 1분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며 남편은 옆에서 그냥 가자고 성화를 댄다. 카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달릴 수 없는 무더운 날씨인데 불안해서 주유는 해야 한다고 난 고집을 피웠다. 바로 가야 한다느니, 차가 가다 서면 어떡하느냐, 오히려 준비 없이 가다가 더 시간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느니 큰소리로 옥신각신했다.
둘째 아기이긴 하지만 아직 예정일이 1달이나 남았으니 그렇게 쉽게 낳기야 하겠어
? 하는 나만의 가늠되는 생각이 있기도 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불안하기만 했다.
운전대를 잡은 내 맘대로 주유하고 나니 예정보다 10분 정도 내비게이션 도착시간이 늘어난다. 시간이 급박할 땐 조금 더 차분해지는 내가 운전대를 잡긴 했는데, 옆에서 늦겠다고 투덜대는 잔소리를 듣다 보니 직진해서 유턴해야 하는 길을 좌회전해서 가면, 더 빠를듯하여 꺾은 것이 오히려 5분 더 늦어지게 됐다. 그래도 과속 단속 카메라 없는 데서 속도를 좀 올리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 눈 부릅뜨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평일 밤이라 차들은 별로 없었지만, 곳곳에서 도로 보수공사를 하느라고 차선을 갑자기 줄여 놓고, ‘공사 중’ 네온사인 판을 단 큰 트럭들과 공사 차량이 줄지어 있어 급하게 차선 변경하며 달리다가 몇 번이나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급한 마음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며 달렸다. 아기와 산모가 무사하게 해 달라고, 부득이 지금 낳게 되더라도 정상으로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해 주시기를……
밤 운전은 싫어하지만,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닌지라 어떻게 달려서 동탄 신도시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1주일 전에 딸이 산전 진료받았을 때, 배가 가끔 뭉친다고 문의하니, 곧 36주가 되어가고 다 정상이니까 이젠 낳아도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산부인과 원장님이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37주 이상 주 수를 채워서 나오면 좋으련만…, 머릿속은 오만가지 걱정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인천 송도에서 동탄까지 고속도로를 정신없이 질주하여 딸 집에 도착하니 12시 10분이었다. 두 돌이 안 된 큰 손주는 제 방에서 자고 있었고, 딸과 사위는 가방을 다 챙겨놓고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긴 인사를 할 겨를 없이 바통 터치하듯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애가 깨면 안 되니 조용히 하라는 말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딸은 사위와 함께 5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하마터면 집에서 애 낳을 뻔했네.”라며 불안해하는 딸을 살포시 안아주며,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주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거야.”라 했다.
병원에 간 사위한테서 카톡이 왔다. 배는 가끔 뭉치는 건 여전하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고 있어서 당직 선생님이 진료한 후, 분만으로 진행하자고 해서 입원을 했다고 한다. 별일 없이 다 잘돼야 할 텐데….
키가 170cm인 딸은 거의 막달이 되어가도 배가 아주 많이 부르지도 않았고, 아직 아기 체중이 3kg이 안될 것 같다고 해서 좀 걱정이 되었다. 1달이나 일찍 분만하면 조산인데, 체중이 미달돼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딸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는 나의 제안에 남편은 일단 잠을 좀 자야 한다고 안방 침대로 가 눕는다. 묵주를 꺼내어 소파에 자리를 잡고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이럴 땐 같이 앉아 기도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너무 늦은 밤이고 내 욕심인 것 같아 그냥 혼자서 기도했다.
1시간을 후여후여 달려오고, 너무 피곤이 밀려와서 비몽사몽간에 소파에서 기도하다가, 거실 매트에 누워서 묵주기도를 하다가,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들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괜찮겠지, 하고 새벽 3시쯤 되어서 묵주를 내려놓고, 안방 침대로 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으앙~ 엄마, 엄마!” 하며 큰손주가 잠에서 깨어 울면서 제방에서 나와 안방 쪽으로 동동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문을 열고 “주원아, 일어났어?” 괜찮아, 괜찮아 “하며 손주를 안아주려 하니, 엄마가 나올 줄 알고 깨어서 눈을 비비며 나오던 손주가 엄마가 아닌 할머니를 보고, 들고 있던 애착 이불을 제 얼굴에 비비며 더욱 큰 소리로 운다.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히고 토닥여주며, “엄마는 병원에 갔어. 주원이 동생 낳으러 병원에 간 거야, 좀 있으면 동생이랑 아빠랑 같이 집에 올 거야.”라며 차분하게 설명해 주고 어르고 달랬다. 아이는 울면서도 찬찬히 말을 새겨듣는 듯 아주 길지는 않게 울다가 그쳤다. 아직 말은 못 하지만 뭔가를 설명하거나 알려주면 기특하게 집중해서 잘 듣는 것이 이 아이의 장점이다. 이제 겨우 19개월인데 벌써 동생을 보다니, 아직 돌봄과 사랑이 많이 필요한 이 아이도 아기인데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깨어 방에서 나올 때 남편에게 지금 몇 시인지 물으니, “지금 5시 34분이야.”라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큰 손주를 달래어 다시 아이 방으로 데려가 토닥이며 재웠다. 방에서 나와 카톡을 보니,
“장모님, 아기 낳았어요.”라고 사위로부터 소식이 와 있었다. “산모랑 아기 둘 다 건강하고요. 아기는 자연분만으로 순산했고, 2.52kg예요. 36주 6일로 조산이긴 한데 별문제 없이 건강해서 신생아실로 보냈어요.”라고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순산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딸과 손주를 잘 지켜주시고, 건강하게 잘 회복되고, 아기도 별 탈 없이 잘 자라게 도와주세요, 아멘.”
잠시 후 사위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신생아실에 있는 작은 손주의 사진이다. 손주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확대하다 보니 침대에 붙어있는 아기의 신상 카드가 보인다.
"최예나 아기 /NSD/ 성별: 남/ 체중:2.5kg
출생일: 2022.8.5./출생시각:05시 34분"
텔레파시가 통한 건가? 큰손주가 자다 깨서 거실로 나온 시각이 5시 34분이다. 동생이 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뭔가 서로 느낌이 통해서 잠에서 깬 것일까?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했고 신기할 따름이다.
큰 손주는 2020년 12월 10일에 3.2kg으로 태어났다. 분만 예정일이 12월 24일 이어서 태명이 ‘루돌이’였다. 산전 진료에서 머리가 조금 큰 편이라고 진단이 나왔는데, 의사는 괜찮다고 했지만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첫 아이지만 예정일을 많이 넘지 않고 조금 일찍 낳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2주나 빨리 나와 줘서 아이 엄마가 덜 고생하고 자연분만을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제 엄마에게 큰 배려를 한 게 아닌가 하고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둘째 아기인데 22일이나 먼저 세상에 나와서 제 엄마에게 더 큰 배려를 한 것 같다. 아들 둘이 모두 나오는 순간부터 끔찍이도 제 엄마에게 큰 사랑으로 효도를 하는 것 같아 진한 감동이 느껴졌다.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니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큰 손주는 태어난 후 머리 크기가 또래 아기 중 상위 1%대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거대하거나 밉상은 아니고 귀엽고 똘똘한데, 만약 그 아기가 분만 예정일을 지나서 더 커서 태어났다면 아마 정상 분만은 못 하고 제왕절개를 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만 시에 회음절개가 깊이 들어갔는지 산후 회복하는데 고생이 아주 많았고, 통증이 오래가고 고통스러웠다고 했었는데, 이번 둘째 아기 땐 2.5kg로 너무 작게, 일찍 낳다 보니, 산통으로 인한 고통은 언제나 참기 힘든 고통이지만, 산후 회복은 빠르고 회음 부위 상처 치유도 훨씬 잘되고 참을만하다는 거였다. 아기는 출생 직후 약간 호흡이 불안정하여 인큐베이터에 잠시 들어갔다가 곧 안정되어 나왔을 뿐 다른 이상은 없어 바로 신생아실에서 보살펴 주었다.
동생이 태어난 시각에 깼다가 다시 달래서 잠들었던 큰 손주는 7시 20분경에 일어났다. 금요일이라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아침을 챙겨 먹이려고 하는데 사위가 들어왔다. 산모와 아기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 큰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다시 병원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주를 어떻게 등원시켜야 하나? 하고 고심했는데 사위가 와서 등원시킨다고 하니 한시름이 놓였다. 직장 어린이집은 딸 회사와는 가깝고, 집에서는 차로 15분 정도 달려야 했다. 카시트도 딸 차에 장착되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었는데 사위가 차를 타고 와서 데려가고 하원도 시키겠다고 하니, 바쁜 중에도 배려해 주는 사위가 더 미덥고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