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바나나

by 고야씨

태어나서 처음 먹었던 바나나의 맛을 기억한다.

엄마 아빠가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신 날이었다.


내가 아는 바나나는 바나나킥, 바나나우유의 바나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또, 만화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바나나는 악당을 골려주는 바나나.

바나나 껍질을 악당이 오는 길에 놓아 악당이 우당탕 미끄러져 넘어지게 만드는 통쾌한 노란 과일.

거기 등장인물처럼 참 이국적인 바나나.



엄청 비싼데 큰맘 먹고 사 온 거라고,

바나나를 하나씩 따서 나와 동생에게 내밀며 엄마가 말했다.

신선하고 노란 바나나,

사진 속, 그림 속, 티브이 속 바나나랑 똑같은 바나나.


만화에서 본 것처럼 껍질을 까려는데 생각보다 단단하게 붙어 쉽지가 않았다.

엄마가 끝 부분을 세 갈래로 살짝 갈라주었다.

세로로 길게 껍질을 내려 가를 때 너무 재밌어서 웃음이 났다.

다 먹고 껍질을 버리지 말고 밟아봐야지 생각했다.



수박바도 맛있지만 진짜 수박이 더 맛있고

스크류바도 맛있지만 진짜 딸기가 더 맛있다.

바나나킥도 맛있고 바나나 우유도 맛있는데

그럼 진짜 바나나는 얼마나 더 맛있을까?


싱그러운 향기에 잔뜩 기대하며 바나나를 한입 깨물었다.


그랬는데,

바나나킥, 바나나 우유는커녕 바나나풀 같은 엉성한 맛.

부드럽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애매한 맛.


엄마아빠는 우리 얼굴 바로 앞에서,

맛있어? 맛있지? 어때? 하는데,

내 동생은 바나나를 바로 뱉어 버렸고,

엄마는 난감하게 웃었고,

아빠는 별론 가보네 했고,

그걸 본 나는 잘 넘어가지 않는 대충 씹은 바나나를 알약처럼 꿀꺽 삼켰다.


“나는 맛있는데. “


엄마는, 바나나 비싼데 다행이라고, 엄마아빠도 맛도 안 보고 사 왔다고, 동생은 싫다고 하니 내가 다 먹어도 된다고 했다.


맛있다고 하면서도 깨작깨작 먹으니,

엄마가 너도 맛이 없지? 하고 물었는데,

난 아껴먹는 거라고 해버렸다.


그러곤 밖에서 놀다 온다고, 먹던 바나나를 들고 그대로 나갔다.

껍질에서 바나나를 쏙 떼어내 풀숲에 몰래 버렸다.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몇 개 그리려다 그냥 쭉쭉 그러버리고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바나나껍질만 무겁게 들고서.


“너 바나나 버리고 왔지?”

엄마는 바로 알았다.

난 고개를 푹 숙였다.


“먹어봤는데 야, 맛이 이상하더라.

별로 달지도 않고, 풋맛이 나는 게 잘 안 익었나 봐.

엄마아빠도 아까워서 겨우 먹었어. “


혼이 날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도 동생도 엄마도 아빠도 다 같이 웃어버렸다.


바나나 껍질을 여기저기에 놓고 조심조심 밟아보았다.

마루에서 제일 미끄러웠다.

뻔히 보이는 내가 놓아둔 껍질을 밟고

과장해서 넘어지는 척을 할 때

만화처럼, 내 주변 색들도 채도가 높아진 것 같았다.


첫 바나나의 맛은 엉성하고 애매했지만

첫 바나나 껍질의 맛은 쨍하게 근사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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