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 일탈

by 고요한동산

뜨거운 물줄기가 닿자 굳어 있던 어깨가 툭 떨어졌다. 몸이 스르르 녹아드는 순간 물줄기 하나가 방향을 틀어 얼굴을 간지럽혔다. 샤워기 방향은 분명 몸을 향하고 있었는데, 하나의 줄기가 엇나갔다.

홀로 방향을 벗어나는 이유가 뭘까. 구멍을 살펴보았다. 부서진 건 아닌지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다른 구멍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가닥의 물줄기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았다. 이완되었던 몸에 불편함이 찾아왔고 아침일이 괜스레 떠올랐다. 물줄기의 일탈이 어쩐지 오늘의 나와 닮은 것 같았다.


감기기운은 일주일도 넘게 끈덕지게 지속되었다. 잔기침이 났고 얼굴도 푸석했다. 그래도 제법 컨디션이 돌아와 점심식사 후 오랜만에 믹스커피를 탔다. 회사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직원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

"네, 이제 괜찮아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이상했다.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이 안 괜찮은데?"

그녀는 늘 내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고 말했다.

'내 얼굴이 아주 볼품이 없어 보이나 보다.'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자리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부터 얼굴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고, 모니터 속 내 표정은 정말 안 괜찮아 보였다.

샤워기의 삐죽 튀어나온 물줄기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동안, "안 괜찮은데? 안 괜찮은데"라는 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녀가 안 괜찮다고 한 내 얼굴처럼, 마음도 어딘가 조금 어긋나 있었던 걸까. 그 말이 빗나간 물줄기처럼 내 안 어딘가를 비틀어 흔들고 있었다. 뾰족하게 튀는 어떤 감정은 내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도록 악마처럼 속삭였다. 불편해진 마음은 사실을 가리고 짓궂게 장난을 쳤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집착을 하게 만들었다.


검지로 물줄기를 위에서 아래로 쓱 쓸어보았다.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물줄기들과 같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물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몇 번의 터치로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쓱쓱 문질러주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장이 났는지 어디가 부서졌는지 애써 문제를 찾았던 것이다.


한참 뜨거운 물에 몸을 맡기자, 초콜릿이 녹듯 단단하던 근육이 서서히 풀어졌다. 김이 서려 뿌예진 거울을 쓱 닦아냈다. 그제야 일탈 중이던 마음 한 줄기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명해진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푸석했고 건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안 괜찮아 보인다고 했던 것이고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보이는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화장대 앞에서 미스트를 잔뜩 뿌리고 한참을 톡톡 두드린 후, 영양크림을 듬뿍 발랐다. 팩을 사다가 매일 밤 얼굴에 붙이는 노력도 해보기로 결심했다. 허무했지만 마음이 놓였다.


누군가는 보이는 것으로 나를 판단할 수밖에 없고 나는 그것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말 한마디가 나의 전부를 평가하진 못하니까.


"아 그래요? 얼굴이 좀 건조하고 푸석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감기는 다 나았어요."

"제가 좀 건조해서 피곤해 보이나 봐요. 앞으로 피부관리를 좀 해볼게요."

"맨날 아파 보이고 피곤해 보이고 큰일이네요. 에너지 좀 올려볼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피곤할 만큼 열심히 일했거든요"


유연한 마음을 가지면 자연스레 재치 있는 말이 흘러나올 것이다. 상대의 말이 내 방향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쓱쓱 마음의 결을 다독여본다. 세상이라는 드라마는 등장인물도 대본도 정해져 있지 않다. 불쑥 나타나는 조연들의 말에 휘둘릴 때마다, 주연으로서의 자리를 잃고 만다. 나는 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삐뚤게 튀어나온 물줄기를 다듬듯, 마음의 방향을 바로잡아 유연하게 리듬을 찾아갈 것이다.


고단했던 몸과 마음이 핫초코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아침이면 원하는 모양의 틀에 담겨 단단히 굳어진다. 밤마다 녹고, 아침마다 새롭게 굳는다. 그렇게 나는 내일도 나의 드라마를 스스로 연출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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