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해 몇 가지 버려야 할 것들
거두절미하고, 캐롤은 멜로다.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의 이야기다.
물론 커플의 성별이 둘다 여자라는 것만 빼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이혼한 사람이, 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갔다가 매장 직원에게 반해, 점점 사랑을 발전 시켜가는 도중, 전남편의 개입으로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은 헤어지며, 나중에는 재회한다는 것.
캐롤, 뜯어 보기
영화의 시작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 캐롤이 백화점에 가면서 시작된다. 캐롤은 백화점 매장 직원인 테레즈에게 네살 난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고 있다며 평소 아이가 좋아하던 인형 모델을 찾는다. 그 모델은 인기 상품이라 품절이라고 말하는 테레즈에게 그럼 네살 무렵, 어떤 선물을 받고 싶었느냐고 되묻는다.
1. 테레즈의 장난감 기차 세트
보통의 여자아이들이라면, 바비 인형이나 주방용구 세트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했겠지만 테레즈는 뜬금없이 장난감 기차 세트가 받고 싶었다고 말하고, 캐롤은 그 자리에서 장난감 기차 세트를 주문하고 배송받을 주소를 남기고 떠난다.
캐롤은 이전에도 베스트 프렌드인 애비와 미묘한 감정을 나눈 적이 있다. 보통 여자들과 다른 답안을 내 놓은 테레즈를 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띄우는 캐롤.
운명적으로 테레즈에게 끌리게 되는 순간이다.
2. 캐롤의 장갑
캐롤이 백화점을 떠난 직후, 테레즈는 캐롤이 놓고간 장갑을 발견한다.
그 날 밤, 남자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Pub에서 수다를 떨며 술을 즐긴 후 집으로 돌아온 테레즈의 눈에 띈 것은 캐롤이 놓고간 장갑.
캐롤은 잠시 그 장갑을 응시하다 장난감 기차 세트를 주문할 때 남긴 주소로 장갑을 되돌려 보낸다.
나는 이 장갑이 이 둘의 두 번째 만남을 이어주는 필연적이고도 의도적인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캐롤은 테레즈가 이 장갑을 돌려주었으면 해서 일부러 놓고 온 것이며, 실제로도 감사를 표시하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테레즈를 초대하기에 이른다.
3. 캐롤의 차 안, 그 격동하는 케미스트리
캐롤의 차는 장면의 전환 외에도 둘 사이의 관계에 따라 설렘, 위기, 갈등 등 복잡 미묘한 감정선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장소다.
장갑을 돌려줘 감사하다며 캐롤이 테레즈를 집으로 초대하여 캐롤의 집으로 가는 차 안, 사랑의 풋풋한 시작과 설렘이 가득하다. 이 장면에서는 실제로도 캐롤의 음성이 흐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처럼 들리는데, 테레즈가 너무 설레어 긴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들 한 번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들리는 순간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떨리는 와중에 잠깐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러 나간 캐롤을 재빨리, 그리고 몰래 카메라 앵글에 담는 테레즈.
캐롤은 그런 테레즈를 눈치챘으나 나쁘지 않은 느낌. 실제로도 나중에 캐롤이 왜 자신을 찍었느냐고 물어보고, 테레즈는 취미로 싸구려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것을 즐기며 주로 사물이나 창문 등을 찍는데, 어느 날 친구가 사진에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니냐고 해 처음으로 사람을, 캐롤을 찍었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둘은 피아노도 치고 수다도 떨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캐롤의 전남편이 갑작스레 찾아와 아이를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캐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약속을 해 놓고 이제와 아이를 데려가야 할 것 같다는 남편과 갈등을 빚고, 그들 사이에서 테레즈는 존재감이 무뎌진다.
캐롤에게 아이는 모든 애정의 근원이자 불안의 시발점이다. 본인이 낳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여러 면에서 남편이 육아에 좋은 환경적 조건을 갖고 있어, 언젠가는 힘의 논리에 의해 아이를 뺏길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예민해 진 캐롤.
결국 전남편이 돌아간 후, 괜히 테레즈에게 화풀이를 하고 만다.
테레즈를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는 차 안의 분위기는 초반과 확연히 다르다.
테레즈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캐롤은 사랑만 하기에는 나이, 계층, 전남편의 집착, 딸의 양육권 등 여러가지 제약이 많아 둘의 관계 유지가 어려울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어색해진 사이, 다시 한 번 사과의 의미로 시카고로 같이 떠나자고 제안하는 캐롤을 거절할 수 없었던 테레즈.
시카고로 떠나는 차 안에서, 캐롤이 울리고 둘의 관계는 다시 해빙기를 맞는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있어 선악과 같은 존재다. 차 안에서 사과를 베어 무는 테레즈의 모습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동성간의 사랑에 눈 뜨고,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었고 또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는 여자의 모습 그 자체다. 그리고 모든 시작의 끝에는 캐롤이 있다.
테레즈에게 캐롤은 지금 껏 고려하지 않았던 답안,
캐롤에게 테레즈는 이미 한 번 틀린 적 있는 오답임을 알면서도 다시 고른 답안이다.
4. 전화, 그리고 그 외의 매개체
이 영화에서 전화는 극의 전개를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쓰이고 있다.
장갑을 돌려준 테레즈에게 만남을 제안하기 위해,
그리고 기차역에 홀로 남겨졌던 테레즈에게 사과하기 위해,
테레즈와 함께 시카고로 떠난 캐롤이 전남편에게,
애비는 전남편이 둘에게 미행을 붙인 것을 알리기 위해 전보를 부치는데, 이 또한 전화의 한 범주로 본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캐롤에게 테레즈가 전화를 걸지만 어떠 한 이유에서인지 끊어져 버리고 만다.
일방적인 이별의 통보에 대한 이유는 전남편이 아이의 양육권 빼앗기 위해 동성애를 근거로 들어 캐롤이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비윤리적인 사람임을 어필하려고 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 심리치료를 받으며, 남들이 말하는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 양육권을 동등히 갖기 위함이었다.
캐롤에게 아이는 연인 만큼이나 놓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까지 아이의 양육권을 고집하지 않겠다며, 변호인의 만류에도 방문 권한만이라도 달라고 울며 양육권을 전남편에게 넘긴다.
이 장면에서는 항상 여유있고 차분한 캐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성을 상실하고 모든 감정을 발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테레즈가 타임즈에 취직했다는 소문을 듣고 타임즈 근처로 가 몰래 테레즈를 훔쳐 보는 캐롤.
캐롤의 모습을 몰래 사진기에 담았던 테레즈의 모습과 겹쳐진다.
결국 재회를 위해 테레즈에게 편지를 보내고, 둘은 호텔의 찻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예전보다 훨씬 세련되게 변한 테레즈와, 여전한 캐롤.
캐롤은 남편과 확실히 정리가 됐다며 같이 살 것을 제안하지만, 시카고 여행때와는 달리 단 번에 거절하는 테레즈, 그리고 테레즈의 친구가 갑자기 둘의 테이블로 끼어들고 캐롤은 자신은 9시 넘어서까지 이 호텔의 오크룸에서 미팅이 있으니 생각이 바뀌면 돌아오라고 하며 자리를 떠난다.
이후, 테레즈는 파티에서 그리고 캐롤은 미팅룸에서 각각 시간을 보낸다.
문득 테레즈는 파티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캐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캐롤과, 그런 캐롤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테레즈.
그리고 이 영화의 끝.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테레즈를 발견하고 그녀를 응시하는 캐롤의 눈빛.
사랑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
처음부터 끝까지 둘은 사랑했다. 어쩌면 애비와의 사랑이 시작하려고 할 때, 용기 내지 못했던 자신을 바로잡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시종일관 만남의 시작과 끝은 캐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테레즈를 끌어 당긴 쪽도, 일방적으로 쳐 낸 쪽도 캐롤아니었던가.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나 남들에 의해 오답으로 채점되는 답안밖에 고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망설여지는 것이 당연하다.
캐롤은 젊고 어리고 예쁘고 순수한 테레즈에게 최고급 카메라를 선물해 준다.
어쩌면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는 조력자로서,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꼭 웨딩링 만이 프로포즈가 아니다. 나는 캐롤이 이미 카메라로 모든 것을 말했다고 본다.
히스테리, 상처입은 여성성
캐롤은 이혼 후 자신의 여성성에 한계를 느낀다. 남편이 지금껏 해온 역할의 공백은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육아도 사회생활도 연애도 모두 부담으로 다가와, 캐롤은 갈등에 사로 잡힌다. 이전의 여유는 간데 없고 짜증과 예민함만 남은 캐롤의 모습.
히스테리는 반대되는 성별의 대상으로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릴때 발생된다. 특히 여성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성격으로 기득권을 쥔 남성에 의해 여성성에 상처를 입은 경우,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히스테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여성성과 남성성이 불균형을 이룰때 촉발되는 성격이다. 이 때 반대의 성별의 그늘 아래서 안정감을 느끼려고 과장된 행동과 감정표현을 하며 주목을 끌거나 이성적으로 유혹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반대로 반대 성별을 부정하기위해 예민하고 히스테리적인 성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캐롤은 끊임없이 이혼한 남편에 대항하여 양육권을 지키려고 했다. 아이에 관련된 이슈에는 예민하게 반응했고 유독 이성을 잃는 면모를 보인다. 또한 반대되는 성별의 권력에 두려움을 느껴 한 껏 예민해지기도 하는 모습에서 캐롤에게 히스테리성 성격이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