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44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를 탓하면 안되는 이유

by 고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 법정에서

심리 공판. 한 때는 사랑해서 결혼까지하고, 두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기쁨을 나누었을 두 남녀, 앙투안과 미리암.


이 둘은 이제 완전히 그 관계를 끝내려고 법정에 섰다. 아이들과 미리암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앙투안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앙투안의 변호인은 그들의 절규를 단지 세뇌로 폄하해 버린다. 가정 폭력은 타인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악을 비호하는 세력은 공감능력이 없다. 폭력의 피해로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격주로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산술적인 판결을 얻어낸 것을 보면.


2. 아버지의 집

아이는 주말이 싫다. 2주에 한 번 씩 끔찍히도 싫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싫어도 어쩌랴. 법이 허용한 아버지의 권리이자 자격인 것을.


면접 교섭권. 그것은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내린 끔찍한 결과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어머니를 때려 가정의 분위기를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뒤늦게 가족에게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고집때문에 격주로 아이는 가정 폭력범과 억지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 이유

3. 어머니의 집

어쩐 일로 잠잠한 나날들이 이어지다가, 방심한 사이 기어코 사건은 터져버리고 만다. 아이들과 미리암이 앙투안에게 알리지도 않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버렸다는 사실이 발각된 후, 앙투안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벗어난 줄 알았던 폭력의 굴레는 다시 한 번 미리암과 아이들의 숨통을 조여온다. 조세핀은 자신의 생일파티에서조차도 마음껏 행복할 수 없다.


스크린 전체를 가득 메운 불안과 긴장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들에게도 그 마수를 뻗어 온다.


4. 욕조에서

앙투안은 폭력 남편이다. 그 문제로 법정에까지 서야 했기 때문일까. 이제 다시 취직도 하고, 착한 사람처럼 조용히 살아가며, 미리암 앞에서 자신은 이제 변했다고 참회의 눈물까지 내비추는 앙투안. 하지만 미리암은 악어의 눈물에 속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가정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앙투안을 밀어낸다. 장기간 학습된 폭력에 대한 방어기제다.


아버지와의 불화에다 미리암의 거절까지 겹쳐지자 앙투안은 또 다시 괴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새벽녘, 사냥용 장총을 들고 미리암의 새 아파트로 찾아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요한 적막을 깨는 여러 발의 총성. 미리암은 패닉에 빠진다.


어떻게 해야 폭력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미리암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극도의 불안과 무력감을 느끼며, 줄리앙의 작은 몸을 온 몸으로 감싸 안아 보호한다.



영화의 끝,
충격과 비례하는 적막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한참 올라가고 있을 무렵에도,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간접적으로나마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어렸을 적 혹은 현재의 트라우마가 다시금 깨어나 마음이 괴로운 사람들 역시 있었을 터.


가정 폭력을 바라보는 제 3자의 시선은, 그 가정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 자신의 일도 아닌 일으로, 자신의 안전까지 해쳐가면서까지 남의 일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좋지 않은 사례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방관한 사이, 피해자들은 생명을 잃어간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 현관을 사이에 둔 이웃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대응한다. 개입하거나 무시하거나.


이러한 문제는 피해자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보면 답이 나온다. 적극적인 신고와 고발. 피해자의 입장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것은 결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굳어져, 우리가 폭력의 그늘로 접어들게되면, 언제 어디에서든 자연스레 작동하게 된다. 제 2의 미리암은, 그로 인해 생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제 3자라면
피해자의 편에 서세요

제 3자가 갖는 힘은 의외로 크다.


신고와 고발을 통해 생명을 살릴수도 있지만,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품의 초반, 아들 줄리앙이 아버지에게 틱틱 거리고 "뒈져라"라는 말을 되뇌일 때, 아이가 되바라졌다고 속으로 욕했다. 미리암이 앙투안으로부터 무작정 회피하려고하며, 핸드폰 번호도 숨기고 새로 이사간 아파트의 주소도 말해주지 않았을 때, 답답해 했다. 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의지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3자의 시선은 상당히 얄팍하고 추상적이다. 핵심을 빗겨 나간다. 가해자를 향한 값싼 동정은 피해자가 무참히 짓밟히고 나서야 후회로 바뀐다. 미리암의 새 아파트의 현관이 완전히 박살 나고서야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두려움과 불안의 근거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


줄리앙과 조세핀의 무조건적인 적대감과 미리암의 불안은 아주 장기간 동안 학습되어온 실질적인 고통이다. 가해자는 상처가 없다. 우리가 돌보아 주어야 할 대상은 피해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용서는 구하는 자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방관자나 제 3자 역시 용서를 부추길 수 없다.



매맞는 아내들을 위한 항변,
피해자를 탓하지 마세요!

매맞는 아내들, 이들은 남편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자기를 잃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폭력의 근원을 회피하면서도, 또다시 흔들리고, 선의를 믿으려고 하고, 자신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렇게 매맞는 아내들이 자꾸만 폭력남편의 그늘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일명,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볼 수 있다.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면, 합리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 불의에 항거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자기(Self)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랫동안 폭력을 당하며 자아가 다치고 제 기능을 상실하면, 폭력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게 된다.


그러나 제 3자들은 매맞는 아내에게 쉽게 이혼하라고 말한다. 맞아도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남편이 감당해온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을 떠맡기려고 한다. 마치 다섯살난 아이에게 회사를 나가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격이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에게는 실질적 지원과 심리상담, 그리고 단계적 조언이 필요하다. 먼저 폭력 피해를 공감해주고, 피해자의 탓이 아니라는 것과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든 부당한 것임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지원 센터에 연결해 주어야 한다. 피해자가 자립할 수 있을 때, 이혼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폭력 남편에게는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주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서로 격리 시켜야 한다. 이것들 역시 탁상 공론에 지나지 않는 표면적 지원에 지나지 않지만, 사견으로는 "이혼해라" 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피해의 근원은 가해자다. 이 또한 잊으면 안된다. 제 3자의 방관을 탓하거나 피해자의 무기력함을 탓하기 이전에 가해자가 모든 불행의 씨앗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혼의 전제는 사랑이다. 사랑해서 결혼한 상대방을 해치려는 태도는 자기 자신의 선택에 반하는 행동이다. 배우자에게는 자신의 불완전한 면을 떠안아야 할 의무는 없다. 물론 서로 보완이 되고 상생을 할 수 있는 지팡이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아예 불편한 다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목발을 짚은 절름발이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자신의 불편한 다리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자신의 연인에게 투사해서는 안될 것이다.



때리는 아빠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매일 불안과 긴장 속에 산다.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울타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외부 요인으로부터 아동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고, 어머니는 무력한 가운데 아이들마저 폭력의 굴레에 노출시켜 버리고 만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적대감을 그대로 학습한다. 약하고 무력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자신이 울타리가 되어주려고 자기가 가진 힘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이 그다지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우울감에 빠진다. 매사 주눅이 들어있고, 남의 눈치를 살피느라 기력을 소진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영화 속에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눈도 잘 마주치려하지 않고, 거처를 숨기고, 어머니를 지키려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아직 보호받아야 할 나이인데도, 어머니를 지키려는 역할을 떠맡다 보니, 항상 힘겹고 버겁다. 도망치려다가도 잡혀버리고, 거짓말은 항상 반격당한다.


아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극도의 불안과 긴장,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미워할까, 아니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할까.


둘다 틀렸다. 물론 두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는 자기 자신을 책망한다. 모든 불화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아이들 그 자체로 순진무구하고 걱정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른의 잘못으로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게 된 어린 새싹들은 어떤 미래를 맞이할까.


가정의 폭력, 근절돼야 하는 이유다. 아무런 죄도 없는 어린 아이의 성격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아이들이 자칫 약자나 강자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학적 상황에서 여전히 피학을 당하는 아동들도 있지만 가학적으로 변하는 아동도 있으므로, 애초에 피학적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울림이 아주 크고,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세요. 친구, 연인, 가족 모두에게 필요한 영화입니다. 가깝고 친밀한 관계일 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학과 피학의 대상이 되어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거든요. 사랑한다면 윽박지르고 때리고 욕하고 화풀이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폭력에는 사랑이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그랬다' 혹은 '사랑하니까 참는다'라는 말은 정말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때립니까? 사랑하는데 왜 상처를 줘요.


가정 폭력은 더이상 가정 내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해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니까요.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설사 죽지 않았더라도 폭력 피해자의 인격은 살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폭력은 피학성 성격을 낳거든요. 피학성 성격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폭력의 이유를 둡니다. 자신이 잘못해서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의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상대방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이 미움받는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매맞는 아내, 그리고 학대 당하는 아이들. 우리 주변에는 그릇된 폭력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피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절뚝 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폭력을 거부하지 못할까요?


출간을 알립니다.

올해 7월, 곧 출간될 저의 책에서는 문제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 다룹니다.


왜 피해자는 가해자를 넘어설 수 없을까.

왜 나는 외모에 집착할까.

왜 부모님은 자식을 위해 희생할까.

살인자의 심리는?

망상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조현병 환자는 정말 위험한 존재인가.

사랑에 미친 사람들은 왜 그럴까.

은둔형 외톨이는 어쩌다 방 구석으로 숨어버린 것일까...


이 모든 행동과 심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썼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또 다른 글으로 찾아올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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