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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y 03. 2019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29 타인의 삶

독일 비밀경찰이 겪었던 <리마 증후군>에 대하여

타인의 삶에는 개인이 없다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 비즐러는 동독의 국가정보부 요원이자, 경찰대학의 교수다. 주특기는 신문과 취조, 진실을 토로할 때까지 극한으로 용의자를 몰아붙이는 슈타지의 전형이다.


어느 날, 경찰대학 동기 그루비츠가 비즐러에게 연극을 한 편 보러가고 한다. 바로 그 연극을 보러 헴프 장관이 올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연극은 타인의 삶을 보는 능력을 지닌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슬픔에 겨워 쓰러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타인의 즐거움을 목격하여 춤까지 추며, 그야말로 타인의 삶에 지배되는 한 여인의 삶.


연극이 끝나자, 그녀를 주시하던 헴프 장관의 입에서, 극작가인 드라이만의 뒤를 캐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중령인 그루비츠는 비즐러 대위를 투입시킨다.


게오르그 드라이만의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명목 하에 수행되는 프로젝트, 이름하야 "작전명: 라즐로"다. 눈 깜짝할 새에 집안의 모든 곳은 타인의 눈과 귀로 가득 찬다. 아주 작은 비밀이라도 들켜버리고 마는,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무대, 주연은 게오르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 질란트.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비즐러는 그들의 집 바로 위에 진을 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러나 옛 스승이자 예술계 동료인 예르스카(동독의 체제와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예술 활동을 강제로 못하게 된)에 대한 안타까움, 연인에 대한 사랑, 동료들에 대한 믿음,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갈증과 좌절을 가장 가까운 데에서 지켜보며, 점점 드라이만을 자신의 친구로 느끼게 다.


사실 이 작전은 크리스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헴프 장관의 질투에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체제적인 스승 아래에서 큰 제자라는 이유도 한 몫했겠지만, 헴프는 크리스타의 연인인 드라이만의 꼬투리를 잡아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이미 드라이만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버리고 만 비즐러는, 그의 반체제 활동을 묵과하고, 예르스카가 작곡한 소나타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드라이만이 읽던 브레히트의 시집을 몰래 읽어보기도 하면서, 슈타지(비밀경찰)로서의 얼굴을 점차 지워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드라이만의 동료는 서독으로 탈출하고, 드라이만은 익명으로 "동독 예술가의 자살률"에 대한 끔찍한 실상을 적어 "슈피겔"에 기고한다.



그루비츠의 표현을 빌자면, 명성에 비해 말썽 부리지 않았던 그가, 이토록 분노한 이유는 바로 그의 스승 예르스카 역시 자살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서독의 유력지 "슈피겔"을 통해 끔찍한 진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는 동독의 악랄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동독 당국은 즉각 범인 색출에 나서고, 결국 드라이만이 기사의 원고에 쓰인 활자체와 같은 타자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예전 같지 않은 크리스타와의 관계, 스승의 자살 등 연이은 불행으로 우울감에 빠진 드라이만의 서재에 슈타지들이 들이닥쳐 집안 곳곳을 뒤진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문제의 타자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는 검거가 불가능하다. 결국 작전은 종료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역시 조금씩 통제의 벽을 스스로 허물어가기 시작한다. 여전히 작가로서 그 역할을 공고히 다지고 있는 드라이만, 그는 그 역시 스파이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때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 위해 문서 열람실에 찾아간다. 베를린에도 봄이 온 덕분이다.



작성자: HGW XX/7 작전명: 라즐로

그의 생활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보고서. 그러나 그가 슈피겔에 글을 기고하기 위해 동료들과 작전을 모의한 것이나, 동료를 서독으로 보내기 위해 계획을 짜던 때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빠져 있다.


그리고 작전 마지막 날에 쓰인 보고서에는 드라이만이 쓰던 타자기의 붉은 잉크가 묻어 있어, 그가 자신의 행적을 묻어주고 타자기 마저 치워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수소문 끝에 보고서 작성자이자 감시관이었던 HGW XX/7을 만나러 가지만, 동독의 대위 신분에서 평범한 우편배달부로 강등된 삶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돌린다.


대신 자신을 지켜주었던 친구 HGW XX/7을 위하여, 옛 스승의 소나타 곡과 동명의 소설을 출간하게 된다. "사람들을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다"라고 믿는 드라이만에게 HGW XX/7은 아주 좋은 사례가 돼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 드라이만의 소설 포스터가 붙어있는 서점으로 들어가 그의 책을 한 권 구매한다. 그는 "포장해 드릴까요?"라고 묻는 직원에게 "아니오, 그것은 나를 위한 책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는 바로 HGW XX/7, 비즐러다.



리마 증후군, 강자가 약자에게 갖는 동정심

리마 증후군*은 인질범이 포로나 인질에게 강자로서 약자에게 갖는 동정심을 일컫는 말이다.


역으로 포로나 인질들이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것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하나, 아마 이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비즐러와 드라이만의 관계를 인질범과 인질로 특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통일 전 동독의 체제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한국의 그 시대보다 더 악랄했다.


그 시절, 당국의 감시를 받던 대상자는 국가의 인질이나 다름없었던 당대의 배경을 들어, ㅡ다소 비약적이지만ㅡ 리마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에 접목시켜 본 것이다. 따라서 이번 글은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미리 알린다.


파리 목숨, 죽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살릴 수도 있는 것

모든 것이 통제권에 들어서 있었다, 라즐로 작전이 수행되었던 그때 그 시절은. 다시 말해, 그때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언제라도 투옥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인간적 고뇌를 지켜보며, 타인의 삶을 감시하기만 하는 체제의 감시카메라로써의 자신의 기능에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드라이만이 느끼는 환희와 기쁨, 슬픔과 좌절, 존경과 우정 등 인간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감정들이, 비즐러에게는 없었다.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은 경찰학교로부터 배운 지식과 경험이 전부였다. 즉, 인간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즐길 새도 없이 중년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의 우정은 경력이라는 밧줄로 억지로 묶여 있었을 뿐이고, 사랑도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저 체제라는 기계의 부품 같은 삶을 살아온 비즐러.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인간성을 일깨워준 인질을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모든 경력을,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었을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타인의 삶을 지켜보는 HGW XX/7을 지켜보는 시선

모든 것에 우선하여, 동정심이 들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단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런 가치를 줄 세우는 일은 시대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 것에서 시대와 세대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체제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었던 시대는 분명히 존재했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삶이 더욱 중요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지금에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자유로운 개인이 가정과 사회, 나아가 국가를 이루고 있으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비즐러는 구시대의 막차에, 그리고 드라이만은 신시대의 첫차에 올라타 있었고, 교차점을 지나 서로의 갈 길을 가는 것이었을뿐, 그 누구도 이들의 삶을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저 별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구시대를 살아온 비즐러의 삶에 동정심이 든다. 성과지향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답안지를 제출하게 되는 역사의 모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이 속한 환경에 따라, 성과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누군가는, 사회주의 국가의 서기관이 되고,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된다. 또한 누군가는 작가가 되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체제에 반대하다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모두 시대와 환경의 장난이다.

이들은 모두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이들이었을 뿐, 그 '좋은'의 의미가 시대적 배경이라는 조건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는 차이점만 빼면 다 같은 사람들이다.


영화 속에서 예르스카가 작곡한 소나타의 제목이 좋은 사람의 소나타(Sonate vom guten Menschen)인 것 역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이라는 개념은 저 멀리, 혹은 가까이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개념이 될 수 있고, 또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HGW XX/7의 삶에서 나의 삶을 보았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방향만을 교육받고, 하나의 결과값이 미리 주어져, 그것을 달성하는 것만이 능사가 되는 그런 사회에서 생존 게임을 하는 삶 말이다.


이것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 망설이게 된다. 내가 잃을 것을 미리 계산해보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삶에서, 나의 삶을 본다. 하게베는 비록 나와는 달리 '좋은' 선택을 감행했지만, 나는 그렇게 못한다.



*네이버 지식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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