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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an 08. 2018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27 빌리 엘리어트

소년의 꿈, 그리고 광부들의 꿈


빌리 엘리어트, 복싱 글로브 대신 발레 슈즈를 신다

학생들으로 붐비고 있는 체육관 안. 체육관을 절반으로 나누어 한 편에서는 복싱, 다른 한 편에서는 발레 강습이 한창이다. 주인공인 꼬마 빌리 역시, 여느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복싱을 배운다. 그리고 복싱에는 영 재능이 없어 보이는 빌리의 어깨 너머로, 여학생들이 발레복을 입고 율동을 하고 있다.


자꾸만 발레반으로 시선이 가는 빌리. 이런 빌리의 모습을 눈치 챈 발레 선생님 윌킨슨 부인은 발레 슈즈를 건네주며 친절히 동작을 알려 준다. 짧은 순간이지만 발레의 매력에 빠진 빌리는 급기야 복싱 수업을 빼먹고 발레를 배우기에 이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발레 관련 교습서를 빌려서 공부하고, 거울을 보며 포지션을 다듬어가는 빌리. 선생님은 재능있는 빌리를 한 눈에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가며 발레를 정식으로 배워볼 것을 적극 권장한다.



암울한 현실에 머뭇거리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영국의 북부 더럼주에서 평생을 나고 자란 아버지는 전형적인 마초맨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권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년 간 광부로 살아오며 거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에게 남자 아이가 발레를 한다는 사실은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마저 불러 일으킨다.


윌킨슨 부인은 아버지를 설득해 빌리가 발레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완강함에 한 발 물러서고 만다. 빌리는 여자애들이나 한다는 발레에 대해 용기 내어 도전했고 재능 또한 충분했지만, 자신처럼 빌리 역시 광부로 살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꿈이 꺾여버릴 위기에 처한다.


한 편, 계속되는 탄광 노조 파업으로 인해 몇 년 간 돈벌이를 하지 못했던 사정으로, 빌리네 가족은 최악의 성탄절을 맞이한다. 당장 차가운 집안의 공기를 데우기 위해 어머니가 남긴 유품인 피아노를 땔감으로 써야할만큼 가난한 형편.


아버지는 이런 상황에 무슨 놈의 발레냐며 괜히 역정을 내고, 치매 걸린 할머니는 자신도 젊어서 발레를 배우고 싶었다며 불편한 몸으로 발레 동작을 선보이는 와중에 빌리는 답답해진 마음을 달래려 텅 빈 체육관으로 달려간다.



로얄 발레 스쿨, 아들과 아버지의 꿈

그리고 그 곳에서 빌리의 무대가 시작된다. 관객은 오랜 친구인 마이클 한 명 뿐이지만 빌리는 최선을 다한다. 답답한 현실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창구, <춤>.


빌리가 무아지경에 빠져 춤을 추고 있을 때, 체육관의 문을 열어 제끼는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였다. 당황한 빌리는 잠시 스텝을 멈추지만, 심기일전하여 전보다 더욱 열정적인 춤사위를 선보인다.


그리고 진심은 통하는 법. 아버지는 빌리의 재능을 깨닫게 되고, 당장 윌킨슨 부인네로 달려가 어떻게 하면 빌리를 최고의 발레리노로 키워줄 수 있는지 자문을 구한다. 윌킨슨 부인은 선의로 자신이 빌리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아버지는 남의 도움을 빌리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아들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결국 탄광 노조로 몇 년을 버텨온 아버지는 아들을 지원해 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꺾고, 배신자들의 버스*(*파업중인 탄광 노조원들을 대신해 일용직으로 고용된 인부들을 실어나르는 버스)에 오른다.



아들을 위해 신념을 버린 아버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때는1985년 경. 영국의 대처 정부가 '돈이 되는' 탄광 산업을 민영화로 돌리고자 전국 광부 노조를 탄압하며, 구조조정을 강행하던 시절이다.


장기전이 되어버린 파업으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한 변변한 음식을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였던 빌리네 가족. 그런데 빌리의 아버지는 아들의 특출난 재능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스스로 배신자의 버스에 올라 타고 만다. 바로 신념과 자본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쏟아지는 야유와 계란 세례에도 아버지는 꿋꿋하게 일용직 인부 대장에 이름을 적으려다가, 아들 탐의 저지로 가까스로 신념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 시대였다. 자본주의의 범람과 민주주의 창궐. 탄광을 민영화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을 감축하겠다는 대처 정부와, 오랜 기간 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곳에서 일하며 노동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노동자. 결국 이 파업은 돈과 사람의 싸움으로 좁혀 들어갔고, 급기야 사람은 돈에 지고야 만다.



빌리 엘리어트, 어머니를 일찍 여읜 시련을 딛고
결국 무대 한 복판으로 날아 오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상실은 우울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하찮은 물건 하나를 잃어버려도 속이 상하는데, 하물며 생전 가까이 지내던 이를 잃고 나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때문에 가까운 이를 잃고 나서 애도를 통해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에게 굉장히 필요한 단계이다.


그러나 애도의 방법은 개인차가 크다. 어떤 이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눈물로써 슬픈 감정을 해소하고, 또 다른 이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여 슬픔을 나누며 이겨 낸다. 그러니 각자의 애도 방식이 다르다고 하여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상실 즉시 감정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상실 후 한참 뒤에서야 그 슬픔과 마주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슬픔이 너무 클 경우 일단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그 감정을 부정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실에 대처하는 자세는 천차만별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역시 애도의 장면을 다루고 있다. 바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빌리네 가족들이 일상 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 부분이다.



빌리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다가 무심코 뚜겅을 제대로 닫지 않고 냉장고 문을 닫으려고 한다. 그런데 거실 저 편, 어머니의 환영이 보인다. 마치 생전의 엄마 모습처럼, '빌리, 뚜겅을 닫고 냉장고에 넣어야지.'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환영. 빌리는 아직 어머니의 손이 필요한 어린 아이다. 이렇게 세심히 챙겨주는 엄마의 사랑이 고픈 열살 꼬마 아이. 빌리는 아직도 어머니의 죽음에 충분한 애도를 표현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놓아주지 못한 채 여전히 환영을 본다.


아버지 역시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아버지. 빌리의 형 역시 때맞추어 터진 탄광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데모 현장에서 격렬히 분노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대체한다.


가족들은 어머니의 상실과 부재로 인해, 각자의 장치를 빌려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잔뜩 화가난 아버지와 형 사이에서 주눅든 빌리와, 치매걸린 할머니, 그리고 초라한 가난 뿐이었다. 이들의 갈등은 빌리가 발레리노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회복된다. 우울감에 빠져 살기에는 빌리의 재능이 너무나도 반짝거렸기 때문일까. 가족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막내를 위해 똘똘 뭉친다.


더럼주를 떠난적없는 가족들에게 있어서, 빌리의 <춤>은 가족 모두의 도전이자, 길었던 애도를 끝내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들의 공연을 기다리며 간만에 웃어보이는 아버지와 형 탐. 이에 빌리는 한 마리의 백조가 되어 무대 한 복판으로 날아오르며 힘차게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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