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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n 10. 2019

유지원, 글자풍경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와 세종대왕의 한글, 민중을 위한 지식 민주화

글자가 만들어 낸 풍경


인간의 생각은 어떻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가?


첫째는 말이요, 둘째는 글이다.

말은 소리이며,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글은 이미지이며, 1차적으로는 기록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필담을 나누고 서신을 교환하는 등의 2차 목적 외에도 글씨 자체로 디자인으로써 소비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말보다는 글에 주목한다. 글자 풍경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글자라는 것은 인류가 지나온 역사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즉, 글자는 인류 역사의 풍경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는 마치 지리적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을 다양하게 진화해 온 인류의 꼴과 닮아 있다. 예컨대 추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이 작아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피부가 검어지는 것처럼,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블랙레터와 화이트레터가 생겨났다.


유지원이 쓴 책은 독일을 닮았다.


유지원의 책 <글자 풍경>은 독일의 블랙 레터와 비슷하다. 세로 여백은 거의 없고 가로 여백은 넉넉한 것이 알프스 산맥 이북의 침엽수처럼 아래 위로 곧게 뻗은 침엽수 마냥 시원스럽다.



이미지는 환경을 닮는다. 아니 담는다.


시대를 거스르는 글자는 없다.


서체라는 것은 가독성과 관련이 있다. 쓰는 사람도 보기 좋게 써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에 관한 문제고, 읽는 사람에게  보기 좋으려면 형태, 즉 이미지가 좋아야 한다.


시대에 따라 환경이 변하고, 환경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독자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글자 풍경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쩌면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시대적 흐름 때문에 글과 말이 사라지고 바코드로만 소통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이슬란드에서 룬문자 소른을 보존했듯, 반대로 우리나라의 아래아가 소멸했듯, 글자의 생명주기는 어느 하나 절대적인 것이 없다. 소멸되고 생성될 것이다.

글자의 진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각, 말과 글의 원류인 '필요'라는 것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달려있다. 필요에 따라 원시 인류가 직립보행을 택하고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발전시키며 변화해 온 것처럼 말이다.

미래의 언어는 반드시 변화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말과 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전달해줄 것이다. 아직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독일에서 한국으로 흐르는 책의 구성


이 책에서는 독일의 비중이 크다. 저자가 유학 생활을 독일에서 한 영향도 있겠지만, 바로 구텐베르 활자 덕이다. 글자에 있어서만큼은 구텐베르크 덕분에 당당히 "팍스 게르마니아!"를 외칠 수 있는 독일답게, 출판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오랜 서고로써 매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 전시회, 즉 북메쎄를 주최하고 있다.

혹자는 구텐베르크 활자 이전에 직지심경이 있었다고 우리 활자의 우수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직지심경의 경우 후대에 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기록용 판화로서 만들어진 것이, 구텐베르크 활자는 움직이는 낱글자를 인쇄할 수 있고 대중화에 그 목적이 있으므로 직지심경보다는 한글비교대상이라고 주장한다.

한글의 모토는 국민들이 나라의 글자를 가질 수 있게 하고, 누구나 쉽게 활용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에 있었다. 중국말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글자 형태를 갖는 것, 그것은 국가의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국민의 지적 수준을 고취시켜주는 지식의 민주화를 의미했다.


특히 한글의 강점은 설음, 즉 소리 낼 때 혀의 모양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표음 문자계의 강자라는 점이다!

또한 '꼚똇쪩녴' 등 표현하지 못할 소리가 없 글자라서 동티모르의 낯선 언어 역시 완벽히 표현해 내 글자를 수출하기도 했으니, 그 우수성은 이루 말할 길이 없을 정도.

구성은 자연스레 서구에서 동양으로 흘러간다. 직지에서 구텐베르크 활자로, 또 훈민정음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티키타카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꼭 의미가 있어야 글자의 쓰임을 다 하는 것일까


어떤 글자는 오랜 세월을 견뎌 묘비에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래픽 디자이너를 감동시킨다. 또한 서양 어느 나라에서는 '홋' 이라는 글자가 모자 쓴 사람 같다며, 한글에 관심을 보인다

마치 그림처럼,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도 가슴을 울리는, 글자는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글자의 힘은 의미에 있다


글자가 없었다면 문학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글자가 없었다면 무엇이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에 전해 줄 것인가.

동굴에 사냥 일지를 남겼던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선조는 자신의 그림솜씨를 한탄했을 것이다.
자신이 호랑이를 잡았는지 고양이를 잡았는지 그 진실을 가려낼 방법이 벽화에 남긴 그림밖에 없다니!

머리 끝에서 부터 꼬리 끝까지 4미터가 훌쩍 넘고, 송곳니가 인간의 손바닥만 한, 산맥 사이를 뛰 넘으며 우렁차게 포효했던 한 마리 금수의 왕은 때때로 인간의 손 끝에서 귀여운 고양이로 전락하고 만다.

글이 있었다면 기록하여 남겼을 텐데 애석하게도 글자 발명 이전의 시대에서는 점과 선이 유일한 기록의 수단이었다. 이런 게 바로 글자의 힘이다. 쓰는 이와 읽는 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고 끝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매직 스펠!



구텐베르크에서 세종대왕으로


유럽, 중동, 인도. 한국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글자 풍경들을 보며 구성과 짜임이 훌륭하다고 느껴졌다.

구텐베르크의 활자로 골든 에이지를 만끽했던 그 화려한 시대에 유럽과 가장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글자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배움의 자유를 주고자 했던 그 시가 각 장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흥미로웠다.

한글이 먼저 나왔으면 초전박살이었을 것이고, 미국의 상업적인 '글'로벌 마켓이 먼저 나왔으면 너무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혹, 이슬람의 잊혀진 문자들이 먼저 나왔더라면 너무 어렵고 거리가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구텐베르크활자-한글 쌍두마차가 이끄는 글자 풍경이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저자와 출판사가 아주 신경 써서 잘 만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나에게 익숙한 문자 문화권으로 들어온 순간, 주의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원고를 쓰고 고치는 기회가 늘어날수록 책 읽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아마도 영어나 독일어 아랍어나 동아시아 문자가 아니라 매일 보던 한글로 챕터가 넘어오면서, 이미지로서의 활자가 아니라 내용으로서의 활자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아쉬움 약간...


'글자란 검은 형상과 흰 배경의 균형을 근본으로 한다는'(124p 하단)는 암묵적 합의를 소제목에도 적용시킨 것일까?


소제목의 폰트나 색, 크기가 본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글의 시작과 맺음이 밋밋하게 느껴졌다. 그저 들여 쓰는 것보다 더 시각적인 방법이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또한 첨부된 이미지들의 배열이 그렇게 세련됐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너비, 폭 등 규격이 자유로운 탓이다. 더불어 어떤 페이지는 첨부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데다 앞장에서 본문 텍스트가 채 마무리되지 않아 독서의 흐름이 끊기기도.


본문과의 경계가 불확실한 각주 역시 아쉽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두툼한 종이와 빳빳한 표지는 코팅되지 않은 종이 날것의 느낌이 나서 좋았다.


다만 위의 사항들은 정말 말 그대로 티끌일 뿐 책의 내용과 구성은 정말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점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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