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15 곡성

사람을 낚아 올리는 의심이라는 미끼

by 고요

프롤로그. 곡성 영화 시작 전 성경 구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39절


영화 <곡성>은 선과 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의심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마을에 잇따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혹자는 환각을 일으키는 독버섯에 의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점점 사건의 범위가 넓어지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무신경하고 게으른 경찰 종구는 살인 사건 현장에서 실제로 해결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 없이 구경꾼처럼 사건을 방관한다. 오히려 앙성한 모습을 보이며 경찰이 맞나 하는 의심까지 불러 일으킨다.
그러다 산속에서 고라니를 뜯어 먹는 외지인을 보았다는 건강원 주인의 말을 듣고, 외지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종구를 외지인의 집 근처로 안내했던 건강원 주인은 벼락에 맞아 쓰러지고, 종구는 마을성당의 부사제를 데리고 한 번 더 외지인을 찾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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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인의 집 안에는 신을 모시는 신당과 방 한 구석에 자리잡은 사진 현상실이 있다. 현상실 내부는 지금까지 죽어나간 사람들의 생전 모습과 사후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붙어있고, 갖가지 소지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 중 종구의 딸 효진의 실내화도 있었고, 얼마 안가 효진은 귀신들린 사람처럼 변해버린다.


이상해진 효진을 살려보려고 다시 외지인의 집으로 찾아간 종구는 사흘 안에 마을을 떠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마당에 있던 개처럼 죽여버릴 것이라고.


장모는 효진을 위해 굿을 해보자고 권유하고, 일광이라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 첫번째 굿을 해도 차도가 없자, 효진을 아프게 하는 장본인을 향해 살을 날려야 겠다는 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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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계속되는 굿에 힘들어 하며 그만하라는 효진의 오열에 종구는 굿판을 엎어버린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함께 외지인을 잡으러 가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외지인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종구 일행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차에 치여 한 번 더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무명.


그 뒤로 계속 의심과 믿음의 싸움에서 혼란을 겪는 종구의 모습들이 이어진다.


외지인이 죽고나서 끝날 것 같았던 마을의 살인 사건이 그 뒤로도 계속 되자 부제는 낫과 묵주를 챙겨들고 외지인을 찾아 나선다. 이 모든 일들이 그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동굴에서 마주한 부제와 외지인. 외지인은 부제가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확신하고 아무리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한다 한들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심하는 대로 믿고싶어 한다며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성흔과 비슷한 상처를 내보이며 부제를 조롱하는 외지인.


그 시각, 종구는 무명과 일광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딸 곁을 지키라는 일광과, 이웃집 닭이 세 번 울때 까지 집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무명. 종구는 고민을 거듭하다 세번 째 울음이 들리기 전 집으로 들어간다. 장모와 부인은 이미 죽어가고 있고 부엌에는 효진이 우두커니 서 있다.


종구는 효진을 부르며 오열하고, 무명 또한 주저 앉아 울부짖는다. 후에 죽음이 드리운 종구네 일가의 사진을 찍는 일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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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우리 곁으로 오는가


거짓은 거짓을 낳고, 의심은 의심을 낳는다. 흔들리는 믿음의 틈새를 비집고 자리잡은 의심이라는 것은 모든 일을 그르친다. 만약 처음부터 외지인의 존재에 의심을 갖지 않고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비극이었다.


무명은 이 모든 비극이 종구의 의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종구는 '어떤 것'이 자신의 딸을 괴롭혔기 때문에 시작된 의심이라며 먼저 의심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한다.


이유가 있으면 의심을 해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의심하기 위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 '미끼'를 문 제3자가 현혹되어 어떤 이를 같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바로 이것이 악이 탄생하는 메커니즘이다. 몇 사람이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미끼를 문 사람들은 의심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가 모시던 신당을 파괴하고 그가 기르던 개를 죽인것도 모자라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 차에 치여 육신을 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외지인이 선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악인이라고 확정지을 만한 확실한 단서가 없을 뿐이지.

절벽에서 떨어져 뼈와 살에 고통을 느끼는 모습과 닭을 살때 흥정을 하고, 자신이 기르던 개가 죽은 것을 보고 감정이 흔들리는 모습에서 외지인이 과연 악마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사건 현장마다 나타나는 것과 집 안 현상실의 사진들, 그리고 산짐승을 뜯어먹는 모습은 악으로 의심될만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동굴에서 부제는 외지인을 보고 주여!라고 말한다. 이 또한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기 위해 절대자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외지인을 보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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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어떠한 얼굴을 하고 우리 곁으로 찾아 오는가.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선인가 악인가.

외지인은 동굴에서 말한다. 자신은 바로 자신이라고. 그는 자신을 신이라 말한적 없고 선인지 악인지 말하지 않았다. 남들이 의심하는 모습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했고 그 순간 외지인의 모습은 부제가 의심했던 악마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자신이 의심하는 대로 보고 행동한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확대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도 있고, 어렵거나 힘든 일을 애써 부정하려고 할 때도 있다.

믿음과 의심은 결국 줄기를 같이 하고, 결국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절대자에 대한 의심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신을 악으로 볼 수 있을까?


절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개인의 사정은 큰 그림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개인이 아니라 세상을 관장하는 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개인의 기쁨이나 슬픔, 고통이나 사랑은 전혀 중헌 것이 아닌 것이다.

닭이 세번 우나 열번 우나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섭리 중 하나다. 마치 영화가 슬프다고 울고 불고 해도 결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 슬프고 안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신을 원망한대도 그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개인이 발버둥쳐도 눈하나 깜짝 않는게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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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의심에서 시작해서 의심으로 끝난다. 황해를 찍을 무렵, 나홍진 감독과 절친했던 누군가가 죽어 장례식에 갔을 때 신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이 과연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과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가운데, 무명과 외지인 그리고 일광이 나타나 서로 자신을 믿어보러고 미끼를 던진다.


우리는 종구가 되어 갈팡질팡하고 결국은 의심한대로 행동에 옮겨 그 결과를 마주 한다. 외지인을 의심한 것, 굿판을 엎은 것, 무명을 못믿어 닭이 세 번 울기 전 집으로 들어 간 것 모두 종구의 의심이 행동으로 옮겨진 결과다. 선인지 악인지 옳은지 그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신을 의심한 댓가로 커다란 혼란을 겪고 원치 않았던 결과를 얻게 된다. 미끼를 물었다 빠져나가지 못하면 그 다음 단계는 미끼를 삼키게 되는 것.

의심하라. 결과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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