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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pr 18. 2017

심리학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 #22 미드나잇 인 파리

파리의 낭만, 참을 수 없는 타임 슬립의 유혹

약혼녀 이네즈와 파리로 여행온 길 펜더(작가). 낭만을 즐기려는 그와는 달리, 쇼핑에만 몰두하는 그녀와 그녀의 부모들. 게다가 우연히 마주친 잘난척쟁이 폴과 그의 애인까지, 길은 잠시도 편할 날이 없다.


폴 커플과 길 커플은 함께 와인 시음회에 참석했다가, 다들 춤을 추러 클럽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길만 혼자 빠져 나와 길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나 익숙치 않은 파리의 거리에서 길은 길을 잃어버리고, 우연히 올라탄 클래식 푸조를 타고 첫 번째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스캇  & 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와 함께 장 콕토가 여는 파티에 간 길은, 콜 포터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고 헤밍웨이가 술을 마시는,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가 친구들과 유쾌하게 수다를 떠는 예술의 황금기에 흠뻑 취하고 만다. 또한 1차 세계 대전 이후 삶에 환멸을 느낀 젊은 예술가들에게 "Lost Generation"이란 이름을 붙인 미국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과 만나, 자신이 쓴 소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가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해도 속물인 이네즈는 귀담아 듣지 않고, 낮에는 소설에 몰두하고 밤에는 자리를 비우는 길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길은 1920년대의 시간에서,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고 우연히 올라탄 마차를 통해 1890년대 '벨에포크'로 또 한 번 시간 이동을 하게 된다. 길이 1920년대를 동경했던 것 처럼, 아드리아나 또한 벨에포크를 동경했다. 결국 그녀는 그 시대에 남기로 하고, 길은 현재로 돌아와 속물인 약혼녀 이네즈와 헤어지고, 시장에서 흘러간 노래 음반을 팔고 있는 파리의 여인, 가브리엘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과거는 미화되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아름다웠던 것일까


문득 수다를 떨다가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영화도 그렇고 배우도 그렇고 음악, 가수, 시대의 낭만, 삶의 양식, 하물며 정치인까지 죄다 옛것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말로 옛날의 것이 우수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전의 나의 모습이 그리운 것일까?


친구들과 전화나 구두로 약속을 잡고 서로 오래 기다릴까봐 십분 먼저 나가던 기억, 혹시나 급한 일이 있는데 잔돈이 없어 전화를 못 걸 다음 사람을 위해 공중 전화의 반환 레버를 돌리지 않고 수화기를 그대로 올려두었던 기억, 가요톱텐을 보려고 저녁을 예쁘게 싹싹 먹고 수박 한 조각 베어물고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던 기억, 가족 신문 만들기 과제 때문에 B4용지를 펼쳐놓고 색색의 싸인펜으로 한 껏 멋을 부려보았던 기억, 모래시계가 방송되면 동네 수퍼까지 문을 닫았던, 급할 것 없고, 모두 손바닥만한 조그만 기계의 노예가 되기 전의 그 추억들.

추억은 때로는 미화된다.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기억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왜곡되어 많은 이들에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Lori Putnam, Midnight in Paris, 2013


주인공 길 펜더는 1920년대의 예술사조를 동경하여 현대에선 기쁨을 찾지 못한다. 피카소의 연인이자 길 펜더와 좋은 감정을 갖고 만남을 지속해왔던 아드리아나 또한 자신의 시대인 1920년대 보다는 벨에포크를 동경한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벗어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현대에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다른 시대의 누군가에겐 사무치게 동경하는 그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왜 그들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보지 못하고 디지털 감성을 쫓는 것일까?


바로 므두셀라 증후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만을 남겨두고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기억 편향이다. 팍팍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 시절의 추억에 빠져 한 번 맛보았던 기쁨을 곱씹는 것 뿐이다. 과거는 심리적 이상향으로써 존재하며, 마치 신기루 처럼 사막 한 가운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힘과 용기를 준다.

나에게 있어 꼭 한 번 되돌아가보고 싶은 시대는 구한말이다. 이상의 작품을 실은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그가 운영하는 커피집을 찾아가 잘 끓인 한 잔의 가격을 지불한 뒤 시대의 낭만과 여유를 만끽하고 싶다. 그러나 그 시대 또한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누군가들에게는 끔찍히도 떠나고 싶은 시공간일 수도 있다.

여러분들의 벨에포크는 언제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그 시대로 가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지금의 삶을 모두 버리고 아드리아나 처럼 벨에포크에 남을 용기가 있는가?

파리에서의 자정.
나에겐 꼭 경험해보고 싶은 시간여행이다.




과거가 미화되는 이유에 대한 글은 #20 마르셀의 추억 편에서 이미 한 번 다룬 주제 인데요, 미드나잇 인 파리 역시 너무나 재미있게 감상한 영화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같은 주제로 글을 또 올리게 됐습니다.


마르셀의 추억에 대한 글도 같이 읽어 주셔도 좋을 듯 합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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