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30
홍콩
홍콩영화를 좋아하시나요? 가끔 이렇게 묻곤 한다. 요즘 홍콩영화의 위상은 예전만큼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옛 홍콩영화를 좋아하고 그리워하고 열광한다. 나 역시 세기말 감성의 홍콩영화를 즐겨보곤 하는데, 그 첫 시작은 홍콩여행에서부터였다. 홍콩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관광지 목록 중에 홍콩영화가 너무 즐비하게 나오기 때문에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눈이 큰 여자는 뇌리에 박혔고, 청킹맨션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California Dreamin'이 반복적으로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장국영, 주윤발, 유덕화가 누군지 잘 몰라도 누군가의 마지막이었던 장소에서 괜스레 숙연해지고, 누군가의 단골식당에서 그가 즐겨 먹는 메뉴를 먹으며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을 혹시 마주치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저절로 따라가고야 마는 것이었다.
홍콩은 정말로 아끼는 나라다. 아끼는 것 이상으로 애틋하고 그립지만 선뜻 가기 두려운 곳이기도 하다. 홍콩에 두 번의 여행을 각각 다른 친구와 떠났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게 그들과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해나 명절에 간단한 안부 인사조차 하지 않고 어떻게 사는지 소식도 전혀 들을 수 없는 그들은 나에게 홍콩에 대한 강렬하고 사무치는 추억을 안겨주곤 별안간 내 삶에서 떠나버렸다.
첫 번째 홍콩 여행 동반자는 아주 절친한 친구였고, 그 당시 친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여행을 가기에 버거운 상황이었음에도 기꺼이 나와 함께 떠나 주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홍콩의 악명 높은 더위와 습도가 우릴 먼저 반겼고, 우왕좌왕 버스를 찾아 타고 기괴할 정도로 정신없이 높은 건물들을 보며 우리는 창문에 얼굴을 바싹 대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우와우와 감탄사를 연달아 내질렀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무조건 하루에 한잔씩 마셔야 한다는 커다란 망고주스를 쪽쪽 빨며 홍콩의 야경과 휘황찬란한 밤거리를 쉴 새 없이 내달렸고, 내 입맛엔 괜찮고 친구 입맛엔 맞지 않았던 어떤 음식들과, 그 반대였던 또 다른 음식들을 먹으며 서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실컷 웃어댔더랬다. 유흥을 즐길 수 있다며 친구에게 일 순위로 추천받았던 어느 거리에 큰맘 먹고 가서 어느 곳을 들어가야 좋을지 세 바퀴를 돌며 고민하다 결국 초입의 제일 사람이 없는 가게에 들어가 칵테일 한 잔씩 홀짝거리다 조용히 귀가했던 시간도 있다. 그때 먹었던 망고주스와 칵테일, 딤섬과 국수들이 아직 내 몸 어딘가에 축적되어 있음을 느낀다. 디즈니랜드에서 아이처럼 달뜬 우리는 인생사진을 위해 여기저기 서보라고 뒀던 훈수와, 길을 잘못 들어 같은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서로 말이 없어지던 그 어색한 침묵과, 해외여행 경험이 별로 없어 나에게 폐가 됐을까 봐 걱정이라는 바보 같은 말들 역시 고이 간직하고 있다. 혼자 쓰기에도 비좁았던 숙소에서 우리는 매번 해도 매번 재미있는 얘기를 하다가 그때가 아니면 못할 이야기도 하다가 줄 서서 산 쿠키 부스러기랑 머리카락도 바닥에 조금 흘리고, 좁은 방이 오랜 시간 머금고 있던 사람 냄새랑 싸구려 샴푸, 바디워시 냄새랑 내 화장품 냄새랑 또 걔 향수 냄새랑 아무튼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엉겨 나에게 여전히 깊이깊이 배어있음을 느낀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덥지근한 당도와 오묘한 향신료들, 빛과 어둠, 걔의 큰 목소리와 내 작은 목소리의 완벽한 화음, 매캐한데 또 달큼하기도 해 계속 맡고 싶은 향이 한 데 뒤섞여 아직까지도 불쑥 고개를 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난 우리의 헤어짐이 거짓말 같다고 종종 느꼈다. 만우절도 아닌데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이 길어지고 있다.
두 번째 홍콩 여행 동반자는 여행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급격히 친해졌고 이렇게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 둘이 가는 여행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말도 못 하게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둘러 친해진 만큼 서로를 구석구석 알지 못했고, 여행 내내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지만 여행 후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귀국 편 비행기가 서로 달랐는데 그때 홍콩 공항에서의 인사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야말로 급하게 가까워졌다 급하게 멀어진 사이가 된 것이다. 그때의 웃는 사진들을 보면 우리가 어땠는지 추억해 볼 수 있을 텐데 하필 또 홍콩 여행으로 한 데 묶어 정리해 놓은 폴더를 실수로 삭제해 버려 이젠 진짜로 남은 것이 없다. '그래, 그동안 행복했고 두 번 다신 보지 말자'라고 말했던 친구에게나,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안 해서 이제 안다고 하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친구에게 갑자기 '기억나니? 그때 우리 참 좋았지.... 그러니까 혹시 괜찮으면 홍콩 여행 사진 좀 보내줄 수 있겠니'라고 묻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없어 보인다. 그러니 믿을 건 내 기억력과 홍콩 영화뿐인 것이다. 이게 바로 홍콩의 저주인가, 하늘이 나에게는 홍콩을 정녕 허락하시지 않는 것인가, 내 인성이 쓰레기인가 자괴감이 들 때면 어김없이 홍콩 영화를 본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그 장소들의 의미를, 명장면이 탄생한 장소에 내가 서있었다는 짜릿함을 느끼고 한 없이 그리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