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에 배달된 향기로운 부케
부엌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내게 부엌은 삶의 비릿한 냄새를 시의 향기로 바꾸는 연금술의 공간이자,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영혼의 허기를 달래는 성소(聖所)입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 김 사이로 때로는 그리움이, 때로는 잊힌 이름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은퇴 후 정착한 이 외딴섬 마을 같은 삶 속에서, 나는 매일 아침 도마 위에 생 대신 문장을 올립니다.
무를 썰듯 단단했던 결심을 썰고, 소금을 뿌리듯 간절했던 기도를 뿌립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부엌 창가로 손님이 찾아옵니다.
초청장을 보낸 적 없으나 불쑥 문을 두드리는 존재, 바로 ‘시인’입니다.
시인은 늘 빈손으로 오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낡은 가방 가득 별빛을 담아 오고, 어떤 날은 내가 오래전 잃어버린 청춘의 조각들을 부케처럼 묶어 들고 옵니다.
그가 다녀간 자리에는 늘 흔적이 남습니다.
식탁 위에는 읽다 만 시집의 구절이 빵가루처럼 흩어져 있고, 찻잔 속에는 당신의 영혼에 닿고 싶어 했던 서툰 편지들이 찻잎처럼 가라앉아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시인이 두고 간 그 떨림을 모아 냄비에 안칩니다.
뭉근한 불로 오래도록 끓여낸 그리움이 한 그릇의 시가 되어 상 위에 오를 때, 나의 부엌은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잔칫집이 됩니다.
누군가 낡은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쉽게 펴지지 않는 고단한 허리를 뒷짐 지고 일어선다.
세월의 무게가 관절마다 삐걱거리며 아우성치지만,
마음은 벌써 문밖의 손님에게 달려간다.
아, 시인이 왔다.
별 꾸러미 속에 어린 왕자의 순수를 담고,
그 속 훤히 들여다보이던 투명한 영혼,
내 생애 가장 뜨겁게 연모했던 윤동주를 품에 안고 왔다.
시인이 내민 또 다른 손, 그 향기로운 부케에는
나의 찬란했던 청춘을 피워내기 위해
몸서리치도록 삶을 녹여냈던 꽃들의 비명과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그대의 내음이 서려 있다.
당신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되고자 밤새 써 내려간 편지들,
수없이 지우고 덧칠한 그 얼룩진 흔적마저도
끝내 당신의 영혼 속으로 접어들고 싶어 했던
시린 청춘의 갈망이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다.
물길조차 끊겨 버린 외딴섬 마을,
때로는 대낮의 정적을 뚫고 소리 없이 찾아오는 시인이
햇살 바른 마당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는데.
나는 온종일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받아 적으며
그리움의 문장을 끓이고 있는데,
정작 기다리는 소식은
윤슬 너머 아득히 멀어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