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냄의 미학: 소리 없는 영혼의 무채색 향으로

’ 나는 당신의 담긴 항아리이고자 합니다 ‘

by 고요정


'나는 당신의 담긴 항아리이고자 합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사랑의 고백은, 상대를 가득 채우겠다는 맹세가 아니라, 나를 완전히 비워내겠다는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나는 그저 흙으로 빚어진 소박한 옹기이고자 합니다. 나의 빛깔과 무늬를 내세우기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가장 조심스럽게 감추어 두고 싶은 진액(津液)을 묵묵히 품어내는 존재이고자 합니다.

항아리의 소망은 곧 겸손함의 미학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오직 타인을 위한 안전하고 따뜻한 그늘을 제공하는 것. 그러나 이 텅 빈 공간은 침묵하는 공허가 아닙니다. 이 비움은 사랑으로 빚어진 공간이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충만한 여백이 됩니다.

'마음을 나누라고 하시네……. 그리하면 채워지리라 하시네…….'

이 지침은 영혼에게 내려진 가장 신비로운 명령입니다. 우리는 채워짐을 바라지만, 그 답은 역설적으로 내어줌에 있습니다. 마치 찻잔에 담긴 물을 나누어 줄 때, 찻잔은 비워지지만 그 공간에 잔잔한 평화와 감사의 향이 채워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과 상실, 혹은 가장 연약한 부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 덜어냄이 아픔을 수반할지라도, 그 무게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집착과 소음을 덜어낸 고요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상실의 그림자 아래 남겨진 공허함은, 사실은 우주를 채우는 생명력이 스며드는 통로였음을. 우리가 외부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채웠던 마음이 비워졌을 때, 비로소 평안과 감사라는 가장 은은하고 순수한 향기가 영혼의 중심에서 피어오릅니다.

그리하여 나의 비움은 더 이상 결핍이나 공허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오직 사랑과 겸손함만이 남아있는 가장 풍요로운 상태입니다. 이 사랑과 겸손함이 나의 덜어냄을 채우는 궁극의 내용물이며, 이것이야말로 버려진 나의 나됨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조용한 의지입니다.

영혼의 가장 조용한 향기는, 자신을 끝없이 비워내면서도 그 자리에 사랑과 감사를 채워 넣는 덜어냄의 미학에서 비롯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