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으로 왔던 사랑이 가고
젊은 날의 사랑이 폭풍우처럼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라면, 세월이 덧입혀진 사랑은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일상에 스며든다.
이제 나는 사랑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확인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의 무게를 알게 된 까닭이다.
내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아니 굳이 해결할 필요가 없는 감정의 방이 하나 있다. 그곳은 문이 닫혀 있으나 어둡지 않고, 말이 없으나 공허하지 않다.
인간의 사랑이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해
애끓는 가슴 깊이만큼이다.
너는 내 가슴속 너무도 깊이 있어서
꺼낼 수조차도 없기에
여즉도 너에게로 가고 있다.
[고요정의 자작시]
'꺼낼 수조차 없다'는 시의 구절을 나는 이제 절망이 아닌 수용으로 읽는다. 당신은 내 삶의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단단히 박힌 뿌리가 되었다. 억지로 뽑아내려 했다면 상처가 되었겠지만, 그대로 두었기에 나는 그 위에 집을 짓고 나무를 심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여즉도 너에게로 가고 있다'는 말 또한 더 이상 목마른 갈망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성실한 일상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그 모든 순간이 내면의 당신을 향해 걷는 걸음이다.
나의 인생이라는 책에는 여러 장르가 섞여 있다.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라는 장르도 있고, 소소한 웃음이 터지는 '코미디'도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당신이라는 '서정(抒情)'의 장르가 흐른다.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비극이 아니라, 내 삶을 조금 더 깊고 그윽하게 만들어주는 서정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담담히 걷는다. 밖으로는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지만, 안으로는 여전히 당신이라는 깊이를 향해 여행하는 중이다.
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나는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엮어 안고 살아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