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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Feb 27. 2024

사기치기 딱 좋은 요리

그냥 귀찮은 그런 날

나는 집밥 만드는 과정이 퍽 즐겁다. 재료를 깨끗이 세척하고, 도마 위에 '탁탁탁' 박자 맞춰 썰어준다. 지글지글, 보글보글, 때로는 조물조물 무친 음식을 그릇에 얌전히 담아낸다. 몇 번은 불러야 나오는 사춘기 첫째와 숟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있는 꼬맹이 둘째. 그리고, 온종일 애쓰고 돌아온 우리 남편까지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온전한 가족의 시간이 된다. 이 시간은 내가 요리를 기쁘게 해내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데 "네가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라던 울엄니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뼛속까지 느끼는 순간이다. 아니 뭐, 가끔 반찬 투정할 때엔 엄마의 특권인 '등짝 스메싱'을 나도 한 번 날려 볼까 고민하기도 하지만. '엄마'이자 '아내'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 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매일 매일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엄마도 사람이다 보니 때때로 손 하나 까닥하기 싫은 날이 있다. 여행을 다녀온 저녁이나, 컨디션이 안 좋은날, 심리적으로 힘들거나, 그냥 귀찮거나 또는 그냥 귀찮거나 아니면 그냥 귀찮은 그런 날 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귀찮은 거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기분탓이니 오해하지 말자.


아무튼 어제가 딱 그런 날이었다. 원래의 내 계획은 이러했다. ' 냉동실에서 냉이를 꺼내 향긋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냉이 옆에 얼어 있던 고등어는 미리 해동 해 두었다가 튀기듯 굽는다. 그리고 마트에서 돼지 앞다리살과 세발나물을 사다가 매콤한 제육볶음과, 입맛 돋우는 세발나물 오이무침까지 만들어 냉장고 속 밑반찬과 함께 낸다.' 크~ 벌써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이 이대로만 차린다면 꽤 훌륭한 저녁 식사가 될 터였다.


'그냥 귀찮은 그런 날'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말이다.


아침 컨디션부터 심상치 않긴 했다. 눈과 손이 퉁퉁 부어서는 물 먹은 솜마냥 발짝을 뗄 때마다 천근만근. 빈속의 모닝커피 수혈을 해 봐도 영 나아지지 않는 컨디션에 아침 준비하는 내내 나무늘보가 따로 없더라. 점심쯤 몸의 컨디션은 어느 정도 돌아왔지만, 맛이 간 정신적 컨디션은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리곤 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날 뇌가 빠릿빠릿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는 뜻이고, 하루의 많은 계획이 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육체, 마음, 뇌'가 합심하여 게으름 피우기 딱 좋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첫 번째 자기 합리화는 제법 그럴싸 했다. "고등어를 구우면 온 집안에 비린내가 진동하니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제육볶음을 각종 쌈과 함께 푸짐하게 내는 것으로 대신 하자." 그럴듯한 유혹에 혹 했으나 일단 마트에 다녀와 다시 생각 해보기로 했다.


닭볶음탕용 닭 원플러스 원


하지만 마트에서의 두 번째 합리화는 너무도 완벽했으니! '닭볶음탕'이라는 글자만으로 게임 끝이었다. 닭볶음탕은 아이들이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던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아하던 메뉴로, 존재 자체로 우리 가족에게 무한한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나에겐 더없이 고마운 메뉴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 게 굳이 자잘한 반찬을 만들 필요가 없다. 아니 만들어 봐야 어차피 손도 안 대니 안 만드는 게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 닭볶음탕은 조리법이 매우 쉽다. 조리 순서고 뭐고 다 필요 없이 그냥 냄비에 모든 재료를 넣고 끓이기만 해도 알아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가족들이 이 비밀을 알 턱이 없기에 일품요리라도 내는 양 나의 어깨가 한껏 치솟는다. 한 마디로 닭볶음탕은 우리 가족에게 사기 치기 딱 좋은 음식 그 자체라는 것이다. 거기다 원플러스원이라니, 오늘의 계획이고 뭐고 단 1초 만에 자기 합리화 완료다.



아마 엄마에게 그런 메뉴 하나씩 있을걸? 카레, 볶음밥, 주먹밥처럼 누가 봐도 쉬워 보이는 음식 말고 삼계탕, 김치찜, 불고기전골, 수육처럼 만들기 어려워 보이면서, 맛있으면서, 냉장고 속 밑반찬이나 김치 정도면 충분한 그런 메뉴.


아무튼 세웠던 계획 중 단 하나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어제의 저녁 메뉴였지만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했던 닭볶음탕이었다. 으흐흐




사기치기 딱좋은 오늘의 레시피

- 김치찜, 수육, 닭볶음탕

1. 김치찜

* 메인 재료 : 돼지고기 800g, 신 김치 2/3통

* 기타 재료 : 대파 1대, 양파 1개, 청양고추 2개

* 양념 : 물 또는 쌀뜨물 1300ml, 액젓 1큰술, 국간장 1큰술, 김치국물 2 작은 국자, 다진 마늘 1 큰술, 된장 2/3큰술, 맛술 2큰술, 설탕 약간(선택사항)


냉동실에 필수로 쟁여 두는 식재료 '돼지고기'와, 한국인의 냉장고 속 물 보다 흔한 '김치' 두 가지 재료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메뉴이다.


모든 재료를 한 번에 넣고 중약불에 끓인다. 쌀을 씻어 취사 버튼을 누른 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약 40~50분 정도 쇼파에 빨래처럼 널려 있자. 거의 좀비가 될 뻔한 몸을 일으켜 간을 보고 신 김치의 쨍한 맛이 부족할 경우 식초를, 신맛이 강하면 약간의 설탕을 넣는다. 너무 졸아들었다면 물을 넣고, 아무래도 맛이 2% 부족하다면 주위를 힐끔거리며 가족들 몰래 엄마 손맛의 비밀가루를 넣자.



2. 무수분 수육

압력솥에 양파와 대파를 깔고, 고기를 올린 뒤 다시 양파, 대파, 마늘, 월계수 잎으로 덮는다. 청주를 몇 숟가락 넣은 후에 뚜껑 닿아 강불로 가열한다. 김이 올라 추가 돌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여 약 15분간 가열한다. 김이 완전히 빠지면 꺼내 맛있게 먹는다.



냉장고에 알 배추나 무말랭이가 있으면 함께 먹고, 없을 땐 대파와 양파 대충 얇게 썰어 파채 무침 만들어 먹어도 좋다. 그것마저 없다면 언제나 그 자리에 일 분 대기조로 기다리고 있는 김치를 꺼내 보자.



3. 닭볶음탕

* 메인 재료 : 닭 1.2kg, 감자 3개, 당근 (생략가능), 대파 1대, 양파 1/2개, 청양 고추 2개

* 양념 (계량스푼기준): 고추장 3T, 진간장 3T, 국간장 2T, 참치액 1T, 참기름 1/2 작은술, 다진 마늘 1T, 생강 1/2t, 고춧가루 3T, 설탕 1T, 맛술 3T, 물엿 1T, 후추 기호에 맞게, 쌀뜨물 500~600ml


어제 마트에서 닭볶음용 닭 1+1행사를 하길래 샀는데 한 팩에 600g인 걸 몰랐네. 요즘 한 팩에 800g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600g이라니! 야박하다, 야박해. 남자가 셋이나 있는 우리 집은 세 팩은 사야 할듯하다.



1. 모든 재료와 양념까지 한 번에 넣고 끓어오르면 딱 5분만 기다렸다가 중약불로 줄인다. 재료가 익는 시간을 생각해서 순서대로 넣고, 뭐 그런 건 귀찮으니까 그냥 한 번에 넣자. 시간이 허락한다면'닭'은 애벌로 데쳐주는 것이 좋다.



2. 뚜껑 닫고 약 30분 정도 끓인다.



3. 버너와 그럴싸한 냄비에 옮겨 담고 식탁에 올려 특별한 요리인양 '사기 친다'


국물이 제법 넉넉한 편이라 싹싹 비벼서 먹으면 밥 두 공기는 저절로 들어가니 다이어트는 내일의 나에게 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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