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Eli Eli lema sabachthani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Eli Eli lema sabachthani)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 마태복음 27장 46절과 마가복음 15장 34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며 외친 말이다. 이 구절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으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Alice Rohrwacher 감독은 "행복한 라짜로"와 "천상의 몸"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성경에서 나오는 나사로(Lazarus)와 마르다(Martha)와의 연관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인물들의 이름을 정할 때 문학적 참고 자료를 이용한다고 밝혔으며, 이는 각각의 캐릭터가 속한 세계와 그 배경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첫 장편작 <천상의 몸>을 보고 연달아 <행복한 라짜로>를 보았다. 그제야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관통한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쓰라렸다.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와 마르타는 묻고 여쭙고 외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몸으로 이 땅에서 묻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영화가 품고 말들은 나에게 공명이 되어서, 말괄량이 삐삐로 유명한 린드그렌의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떠올리게 했고, 그 동화책 안에 실린 작가 한강 님의 글을 떠올리게 했으며, 동시에 스트랜드 베리의 희곡 <꿈의 연극>을 떠올리게 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 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하고 있는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스트랜드 베리의 희곡 <꿈의 연극>에서의
아그네스의 대사는 이러했다.
“Oh God, they are neither pure nor kind. They sin, and in their sin, they continue to live, bringing forth new suffering. They fear pain, yet remain within it, seeking hope. Why did You make them so frail? Why did You burden them with such sorrow?”
신이시여,
저들은 결코 깨끗하지도 착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그 죄 속에서 살아가며 또 다른 고통을 낳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두려워하지만,
여전히 그 고통 속에 머물며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왜 저들을 이렇게도 약하게 만드셨나요?
왜 이토록 많은 고통을 주셨나요?
인간에 대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는 매우 순수하고 착한 인물로 그려지며,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에 의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연상시킨다. 라자로는 세상의 변화에 무관하게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인물로, 이는 성경적 인물 나사로와의 상징적 연결고리를 연결하였는데 그 먹먹함이 이로 말할 수 없었다.
<천상의 몸>에서 마르타라는 이름 역시 성경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의 연결성을 가지며, 종교적 배경을 반영한다. 마르타는 자신의 신앙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인물로, 어른의 세속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성을 느끼며 영화는 끝이 났다.
갈 곳을 잃은 두 손과 두 발은 허공에 떠돌며 부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의도는 과거나 먼 미래에 가닿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지금에 머물렀으며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선과 악에서의 줄타기도 하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천상의 몸에서의 죽음은, 소녀가 발견한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이었으며 그 고양이들이 어른들의 손에 넘겨져 검은 봉지 속 도심 한가운데의 강으로 내쳐진 순간이었으며, 행복한 라짜로에서의 죽음은, 라짜로를 은행강도로 오인한 사람들로 인한 폭력에 머물며 라짜로는 눈을 감는다.
탄생도 나의 것이 아니었기에, 죽음도 나의 것이 아니었다.
동물이건, 인간이건 가장 연약한 몸으로 태어나 사라진다. 저마다의 피조물로서 오롯이 살아내다가 맞이하는 저마다의 모습들을 목격하면서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 또한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서도 함께 흐른다.
가장 연약한 동생 칼은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형 요나탄이 자신들의 그곳인 낭기열라로 먼저 떠나게 된다. 이 동화책은 어린이들은 위한 책이지만 첫 장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른들의 세상에서의 동생 칼은 어린아이로서 몸이 불편한 연약한 존재로 머무르고 떠난다. 자신을 구하려다 먼저 죽은 형 요나탄이 먼저 그곳, 낭기열라에서 멋진 사자왕으로서 동생 칼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곳 역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더 큰 어두운 존재와 투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가장 무서운 존재와의 투쟁 후에도 둘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탄생을 약속한다.
그것은 어쩌면 선과 악, 그러면서도 죽음과 탄생의 반복의 굴레에서도 존엄적인 질문을 건넨다.
나는 무엇 때문에
요나탄 형이 그처럼 위험한 일을
해야 되는 냐고 물었습니다.
기사의 농장 벽난로 앞에 앉아
편안히 살면 안 될 까닭이 뭐란 말입니까?
그러나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이 이야기들은 한강 님의 글처럼 폭력에서 존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가장 연약한 존재로서.
그것은 우리가 머무르는 이 차원에서 태어나고 살아지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존재에 대한 깨달음적 차원에 다가가게 만든다.
이렇게 생멸하는 존재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에서 폭력이 아닌, 폭력에서 존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선험적인 질문들 사이에 놓여있었다.
죽음에서 부활했던 성경 속 나사로 결국 사람들 속에서 가장 연약한 몸으로 눈물을 흘리었던 가장 순수했던 마르타와 라짜로, 그것은 칼과 요나탄의 용기이자 존엄으로 나아가던 가장 큰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신의 자식으로서 아그네스의 울부짖음과도 맞닿아 있었다.
세상은 그렇다.
가장 두렵지만 마주해야 할 질문들을 우리는 때론 멀리 지워버리고 살아진다. 무엇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지를 대면하기 두려워 스스로의 질문을 포기한 채로 주입된 사상들과 세상의 현란함 속에서 진실이 가닿지 않은 허공의 잿빛처럼 떠도는 말들과 폭력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그래서 아팠고 눈물이 났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진실과 맞닿아 있는 선험적인 활자들로 유리알 유희 같은 본연의 순수한 질문들에서 나를 돌아보며 이 세계에도 참 어른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안도하며, 나는 그저 멀리서 조용히 감사할 뿐이다.
시자 왕 형제의 모험에 담긴 마지막 문장인 한강님의 글로 마무리한다.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