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 리들의 그림책 <달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는 야생동물인 여우와 당나귀가 인간들이 사는 도시에서 겪는 적응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에 훌륭하게 적응했다는 여우와 부적응자처럼 그려진 당나귀 험프리가 주인공이다. 여우는 원래 자신의 이름은 여우들만 발음할 수 있으므로 도시 사람다운 이름을 새로 만들었다. 무엇을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공장에서 일도 하고 집도 구했고, 사람처럼 신문도 보고 밥을 먹는다. 반면 험프리는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주거지도 없다. 적응자와 부적응자의 비교가 보기 쉽게 그려진다. 어느 날 험프리가 주웠지만 여우가 발견한 초대장을 통해 <달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연극이 험프리에게 전환점이 된다. 공연을 보고 난 후 당나귀 험프리는 "여기는 우리의 도시야!"라고 외치며, 갈림길에서 밝은 표정으로 친구인 여우를 안아준다. 그 갈림길은 각자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여우가 새로 만들었던 사람다운 이름을 기억하려 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림책의 주인공은 그냥 ‘여우’와 ‘험프리’다. 이름 또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독자로서 내가 험프리는 기억하고 여우는 그냥 여우일 뿐으로 남았다는 것이 하나의 질문이 되었다.
도시에 적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에는 ‘소유’의 문제로 초점이 맞춰졌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문명의 도시, “나 서울 살아~”하는 서울과 지방, 혹은 서울과 수도권의 비교 속에서 ‘남보다 낫다’는 심리적 우월감이 문제의식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다르게도 생각해 보니 ‘적응’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머물렀다. 태어나 자라면서 익숙하고 편안했던 나의 영역(야생)을 벗어나 또 다른 영역(도시)에서 살기 위한 사회적 노력에 초점을 맞춰본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순간 적응하며 살아왔다. 부모에게 적응하고, 가정상황에 적응하고, 더 자라서는 기관에, 학교에, 직장에 적응한다. 매 단계마다 이 ‘적응’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마주한 사회나 집단이 요구하는 대로 맞추어 나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볼 것이냐, ‘나’라는 존재와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이냐를 고민하고 변화할 것이냐.
부모로서 내 교육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평균의 종말>에서 토드 로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적응’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남들처럼 혹은 남들처럼 되되 더 뛰어난 것이 적응을 잘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개인의 이름과 색깔을 잃지 않고 나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타인의 이름과 색깔을 존중해 주면 된다. 각자의 길을 함께 하면 우리의 도시가 될 것이다.
누구나 나를 찾고 싶어 한다. 그렇다는 건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좀 마음먹고 다시 나를 찾아보려 하는데 그마저도 어떻게 하면 험프리처럼 우연한 기회를 맞닥뜨릴 수 있을까, 그 기회를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누가 알려줄 것인가.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눈에 선명히 보였으면 좋겠다고 안절부절못한다. 이것 또한 내 안에 있는 불안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내 안에 답이 있다는 것. 그래. 저 끝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보면 그 점들이 연결되어 어떤 길을 만들 것이라는 믿음만 가져보자. 내가 어떤 길을 만들었는지는 다 지나가서야 뒤돌아 봐야 할 것이니, 나는 앞으로 길을 만들어가면 된다. 아직 나는 젊고 건강하고 적응을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