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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두두 Jul 13. 2022

내향적인 아이, 에너지의 방향이 다를 뿐

야시마 타로 <까마귀 소년>

"왜 혼자 내려와? 친구랑 같이 내려오지."

"왜 혼자 그네 타고 있어? 친구들 저기 모래놀이하네. 가서 같이 놀아."

"친구한테 같이 앉자고 하지. 혼자 괜찮았어?"


아이가 '혼자' 있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내 마음은 불안해졌다. 수업이 끝나고 혼자 털레털레 교문을 나왔을 때, 놀이터에서 무리 진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그네를 타고 있었을 때, 현장체험을 가는 버스 안에서 혼자 앉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친구들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 떨어지는 건 아닌지, 소외된 건 아닌지, 이미 친구들도 "우리끼리 놀자~"는 마음이 자리 잡은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다 왕따가 되는 건 아닌지.


아이는 의외로 담담했다. 

"엄마가 기다릴까 봐 빨리 나오느라 그냥 온 거였는데." 

"그때 나는 그네가 타고 싶었거든."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구경도 하고 상상도 하고, 하나도 안 심심했는데." 


내가 '혼자'여서 걱정했던 것들이 아이에겐 안중에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 아이가 괜찮다니 내가 괜히 불안해하지 말자.'라고 나를 다독였다. 차라리 안 보고 모르는 것이 낫겠다 싶어 일부러 놀이터에 나가지도 않았고, 아이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혹시 마음속에 상처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면 나도 모르게 아이 눈치를 보곤 했다.




야시마 타로의 그림책 <까마귀 소년> 에는 선생님과 아이들을 무서워하는 한 소년이 입학식 날 학교 마룻바닥 밑에 숨어 있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 소년은 공부도 노는 것도 뒤처지고 떨어져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매일 '한결같이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에 온다. 비 오는 날에도 소년은 우산도 없이 도롱이만을 걸친 채 타박타박 걸어서 온다. 


최소한의 보호막을 갖고 한결같이 걸어왔다는 것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고, 단단한 아이의 마음이 느껴져 기특하기도 했다. 


야시마 타로의 <까마귀 소년> 중



그렇게 5년을 외톨이로 묵묵히 학교를 다닌 이름도 모르는 소년. 6학년 때 새로 오신 이소베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으로 인해 점차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소베 선생님은 자연을 사랑해 머루가 어디 있는지, 야생화의 이름이 무엇인지, 까마귀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는지. 이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들을 내보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동안 '멍청이'라는 편견을 가졌던 반 친구들도 소년의 다른 면을 보고 이해하게 되면서, 지난 괴롭힘 들을 반성한다. 그리고 소년은 아이들이 붙여준 새로운 별명 '까마동이'에 미소 짓는다.


야시마 타로의 <까마귀 소년> 중




1955년부터 약 40여 년 동안 진행된 하와의 카우아이섬 종단연구는 "좋은 어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보여준다. 열악한 가정환경, 중범죄자, 마약중독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도 "한 명의 믿고 의지할 어른"이 있으면 끔찍한 상황도 견뎌낼 수 있으며,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까마귀 소년>의 이소베 선생님처럼 아이의 또 다른 면을 관찰하고,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소 한 명의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좋은 어른"은 부모가 먼저 되어야 한다. 그림책 뒤표지에 서술된 "참 교육의 의미"는 교사가 아닌 부모가 먼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나는 단 몇 번, 내가 관찰한 모습을 내 기준에서 판단했다. 분명 아이는 '문제없는' 교우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단짝이 없음을 걱정했다. 책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라며 자랑하면서도, 학교에선 책 보지 말고 친구들이랑 놀라고 강조했다. 담임 선생님은 독립심이 강한 편인 것 같다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혼자 소외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친구관계에 더 적극적이지 않은 것에 늘 아쉬워했다. 사회성 부족일까. 공감력 부족일까. 그 편협한 고민은 항상 나에게서 시작했다.


아이는 에너지의 방향이 다를 뿐이다.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하고, 특히 아이는 운동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자 아이는 또래 관계가 중요하다는 프레임에 얽매여있는 한, 그렇지 못 한 아이는 저절로 '이상한 아이'가 돼 버린다. 까마귀 소년이 교실 천장, 책상의 나뭇결, 창 밖 자연, 지네와 굼벵이, 온갖 소리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소년의 관심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이 쏟는 에너지의 방향이 그쪽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내 아이의 에너지에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에너지의 방향이 바깥으로 뻗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으로 흐르는 것일 뿐이다. 결국 아이에 대한 걱정은 오로지 나의 기준에서 시작된, 혹은 나의 기준에 영향을 끼친 사회적인 잣대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아챈다. 


부모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소베 선생님처럼 가만히 아이를 들여다보고 알아채 주는 것이다. 아이의 에너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 자체로 특별하다'는 믿음과 사랑을 보내주는 일이다. 


매번 깨달으면서도 다시 잊어버리지만 '존재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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