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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두두 Feb 16. 2022

그 녀석의 습격, 누구냐 넌!

암컷 실종 사건 추적기

닭들에게 나의 호의를 베푼 날이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겨울날, 김장철이 지나도록 아껴놓은 텃밭 배추를 닭들에게 오픈했다. 손 호미질로 맨 땅을 개간하여 흙 사다 나르고 퇴비 퍼 날라서 겨우 만든 텃밭에 심은 배추다. 하지만 역시 제대로 된 밭에서 다년간의 경력으로 시어머니가 길러내신 배추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김장은 시골 배추로 해냈다. 그래서 내가 애써 키운 무농약 배추는 닭들의 차지가 되었다.


울타리 문을 걷어내니 닭들이 말하지 않아도 텃밭으로 향했다. 아직 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싱싱한 배추 앞에 몸 둘 바를 모르던 닭들은 맹렬하게 뜯어먹었다. 그래서 그 자유로움을 만끽하라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나의 호의와 배려는 지나쳐서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닭장을 만든 5월부터 울타리를 만들기 전까지인 9월까지는 줄곧 마당에서 자유롭게 활개 치던 녀석들이다. 놀고 싶으면 나와서 놀고 어두워지기 전에 재깍재깍 닭장으로 들어가던 녀석들이다. 그래서 그러겠거니 하고 나는 집에 들어와, 낮잠을 잤다.


너무 많이 잤다. 일어나 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어 남편이 닭장 문을 닫으러 나갔다. 그런데 다시 들어온 남편이 청계 암컷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모두 닭장 안에 들어가 횃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잘 준비를 하는데, 이제 4개월 차 된 암컷이 보이지 않았다.    


별리, ♡ 마리 ♡, 플리




귀한 암컷이 사라졌다. 뒤늦게 터진 아들복 덕에 3차 시도에 얻은 첫 청계 암탉이다. 청계는 보통 5개월 전후로 초란을 낳는다고 하니, 조금만 더 있으면 산란계가 될 유망주 '마리'였다. 이미 어둑해진 닭장 울타리 주변엔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솜털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당했구나. 말로만 들었던 야생 짐승의 습격이었다.


애써 키운 닭을 정체 모를 어떤 녀석이 낚아채 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조금 더 있으면 산란계가 될 귀한 암탉을 잃었다는 슬픔도 작지 않았다. 그리고 방목이 아니라 방임해서 잃었다는 사실에 자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플래시를 들고 근처를 돌아다니다 용의자 2마리를 발견했다. 주인이 있는 듯도 싶고 없는 것도 같은 얼룩 고양이가 용의자 1이었고,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용의자 2였다. 그 두 마리의 고양이는 매우 평온하게 서로를 부르며 길을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진짜 범인은 역시 현장에 다시 나타났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범죄심리학의 기초 지식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직 동이 제대로 트지도 않았는데, 마당으로 나가니 앞에서 휙! 하고 지나쳐 석축을 재빠르게 내려가 골목길을 걸어가는 그 녀석이 보였다. 너구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얄밉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온통 윤기 나는 검은 털에 네 발과 배의 일부만 하얀색 털이 있어 마치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해가 밝자마자 나는 암컷 실종 사건의 추적자가 되었다. 안전에 유난히 민감한 남편은 절대 우리 집 테두리를 넘어서 가지 말라고 했다. 이미 당한 거 잊으라고. 앞으로 다른 애들 단속만 잘하자고.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가다가 도망쳤을 수도 있으니,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숨이라도 붙어 있을 수 있으니 찾아보고 싶었다.


우리 닭의 털로 보이는 증거물들이 떨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몇 발자국 가면 또 솜털이 떨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또 얼마쯤 가면 또 보송보송한 솜털이 떨어져 있었다. 옆집의 뒷산으로 올라가는 산책로였다. 얼마쯤 따라가니 사람이 다니는 길을 넘어 수풀로 들어갔다. 길에 떨어져 있던 증거물들의 양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털들이 떨어져 있었다. 당했구나. 순간 무서워져 끝까지 추적하진 못 하고 털레털레 돌아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울타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정말 자유로움을 선물하고 싶을 땐 내가 지키고 서 있다가 아쉽지만 들어가자 하고 닭 몰이를 했다. 그리고 수시로 거실 창으로 내다보며 닭들이 잘 있는지 살피게 되었다. 남편은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 검색을 통해 고양이들이 신 냄새를 싫어한다고 해서 대책을 마련했다. 식당에서나 쓰는 대량 식초를 주문했고, 귤껍질을 잘게 잘라 그 녀석이 왔던 길목에 뿌리자고 했다. 매일 나오는 원두 커피 찌꺼기도 음식물 쓰레기 냄새 없애는 용도에서 고양이 쫓아내는 무기로 바꾸자고 했다.


이 대책을 실현하기 전, 그러니까 암탉이 사라진 지 만 48시간이 되기도 전에 그 녀석이 또 나타났다. 아는지 모르는지 호기롭게 거실 창 바로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호시탐탐 닭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름 닭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소나무 뒤에 몸을 가리고 웅크리는 모습이 꽤 진지하다. 딱 내 눈앞에 너무나 잘 걸려드는 줄은 모르고. 당장 문을 열었더니 놀란 척도 안 하고 시크하게 도망가 버렸다.




 



닭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왕이면 넓은 데서 살라고 뒷산 올라가는 길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어 지붕 없는 운동장을 선사했다. 땅에 뿌리 박힌 신선한 배추를 맘껏 뜯어먹는 즐거움을 맛보라고 울타리를 넘어 마당에 풀어놨다. 그래 놓고 나는 어처구니없게 어둑해지도록 집 안에서 낮잠을 잤다.


방목이 이렇게 위험한 것임을 미처 모르고. 겨울에 먹을 것 없는 야생 짐승들한테 당할 수도 있다는 주변의 조언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이젠 거의 다 큰 성계이니 들고양이가 잡아가지 못할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둬놓고 키우긴 또 싫다는 고집을 부리고.


"차라리 수탉을 잡아가지."라고 말하는 지인의 말에 그렇다고 동의를 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게 내 속마음 수 있지만 "그러게요." 하기는 싫었다. 옆에서 뻔히 보면서도 도망치기 바빴을 그 암컷의 동기 수컷 두 마리에게 "너희는 뭐 했니?" 하고 타박도 해 봤다. 그러다가도 그 수컷들도 얼마나 놀랐겠나 싶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만다. 조심히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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