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두두 Feb 14. 2022

수탉 신사의 식사 매너

남편, 당신도 배워라

닭에게 12 주령 즉, 3개월 차라는 시기는 매우 의미가 있다. 특히 수탉은 외양이 제법 화려하게 탈바꿈한다. 병아리 때와는 다른 색깔의 털이 목 주변과 날개를 감싼다. 꼬리깃도 길게 뻗어 나와 휘어지면서 멋진 뽐내기를 한다. 그리고 변성기 같은 쉰 목소리로 새벽을 알리는 시도를 한다. 수탉들끼리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했던 서열싸움이 종지부를 찍고 확실히 누가 일인자인지가 결정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으로 말하면 사춘기가 따로 없다.


이때 이성에 대한 인식도 생기는지 암탉을 쫓아다니거나 올라타려는 시도도 한다. 섣부른 호기심으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암탉 위에 올라타 다시 암탉으로부터 맹공격을 받기도 한다. 또는 기술 없이 암탉의 목덜미를 콱 물어 암탉이 놀라 몸부림치며 빠져나가기도 한다. 어설픈 수탉의 접근에 '쯧쯧, 수컷들이란..'말이 절로 나오더라.

  

그런데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다. 매너 있는 수탉은 암탉의 식사를 챙긴다. 어느 날 특식을 넣어주는 그릇에 뭘 좀 채워줬더니 재빠르게 선점한 수탉이 먹지는 않고 계속 '꾸룩 꾹 꾸꾸 꾸루룩꾹'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벽을 알리는 소리는 아닌 것 같고, 먹으려면 먹기 바쁠 테니 반찬투정은 아닐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먹을 것에 입을 대더니 한 입 물고 고개를 쳐들어 도리도리 하더니 또 그대로 퉤 뱉어 버린다. 몇 번인가 먹지는 않고 톡톡 건들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길래 저 녀석 반찬투정인가 싶을 때, 마침 함께 있던 나의 닭 키우기 멘토가 놀라운 이야기를 해 줬다.

 

암컷에게 계속 먹을 것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란다. 자기는 먹지 않고 암탉에게 여기 먹을 것이 있으니 어서 와서 먹으라고 물었다 뱉었다 하는 것이란다. 잠시 후 암탉이 와서 전후 사정 안 살피고 코를 대고 한참 먹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남는 것을 먹는 수탉의 모습. 그 식사 매너에 진심으로 놀랐다.



수탉의 밥 매너가 꽤 기특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서운했던 밥시간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퇴근하고 돌아와 부리나케 저녁밥을 지어 식구들을 먹이는 밥시간이 즐거움보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 컸다. 심지어 둘째는 내 무릎이 자기 방석 인양 깔고 앉아 일일이 떠먹여 줘야 그나마 먹어서, 내 밥시간은 최후의 후루룩 1분 밥 마시기 전법을 발휘하는 시간이었다. 회사에서 먹던 대로 스피드 있게 자기 밥을 해치운 남편이 아이를 좀 봐주면 좋으련만, 무심하게도 소파로 뒤돌아 가던 모습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한 번은 시댁에서 아기띠에 둘째를 들쳐업고 시어머니를 도와 저녁을 준비했다. 그날의 메인 메뉴는 바로 소고기였다. 열심히 한 상 차려 놓고 남편이 구운 소고기를 첫째 그릇에 옮겨놔 주고, 때마침 잠투정하는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갔다. 차라리 재우고 나오면 나도 편히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정작 방에서 나오니 이미 12명의 대식구가 소고기를 다 먹고 난 후였다. 내 몫은 놀랍게도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물과 김치를 곁들어 다 떠난 밥상에서 꾸역꾸역 먹는데, 왜인지 알 것 같은 억울함이 눈물로 터져 나올까 봐 간신히 참았었다. 나는 또 뒤끝 있는 여자라 집에 돌아온 후 어떻게 내가 먹을 소고기가 한 점도 남지 않았냐며 남편에게 눈을 흘겼지만, 정말 몰랐다며 미안하다는 남편의 어이없는 답변만 들었다.


꽤 단순한 삶을 사는 수탉의 식사 매너를 보고 왜 내 밥에 대한 서러움이 소환됐는지 모르겠다. 왜 나에게도 밥은 매우 중요하니 애를 좀 봐 달라고 부탁하지 못했을까. 왜 나도 소고기는 먹고 싶으니 내 몫을 남겨달라고 얘기하지 못했을까. 꼭 얘기해야만 아느냐보다 이젠 얘기해야 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드는 생각이다.


내가 번아웃으로 인한 우울증을 겪고 나서부터인지 아니면 전원주택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인지 남편은 여러 면에서 매우 다정해졌다. 원래도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나의 밥시간을 보장해줄 만큼 섬세하진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엔 내가 먹는 걸 챙긴다. 연애할 때 식당에서 생선구이를 먹으면 남편이 살을 다 발라줬는데 결혼하니 어느새 내가 발라주고 있고, 요즘은 언제부턴가 남편이 다시 발라주고 있다. 시댁에 가면 시부모님과 시누이가 보는 앞에서 생선살이며 고기 살을 내 밥그릇에 넣어 준다. 생각해보니 수탉보다 더 적극적이고 배려있는 식사 매너다.


그래. 그러니까 같이 사는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이 닭을 사랑하게 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