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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두두 Feb 10. 2022

남편이 닭을 사랑하게 됐다

부부의 공통 취미

전원생활을 시작하고 남편이 변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소파에 배 깔고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남자였다. 민들레 풀과 시금치도 구분하지 못하는 나름 도시남자가 시골생활을 하기 시작하니 부지런해졌다. 그리고 더 다정해졌다. 그 둘의 상관관계가 무엇인지 묻고 싶겠지만 나에겐 그 말이 그 말이다. 나와 전혀 다른 컴퓨터를 머리에서 굴리고 있는 남편의 속사정이야 알 바 없지만 스스로 설거지도 더 자주 하고, 청소도 하고, 닭들을 챙긴다.


그래. 닭들을 챙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이들의 작은 소망 한 10%, 나의 의지 90%로 시작한 병아리 부화시키기. 내가 병아리 키우는 체험 정도만 하고 다른 집으로 보낼 거 아니냐는 말로 나의 오기를 불타오르게 했던 남편이다. 닭장을 마련해 달라는 나의 요구에 2주 넘게 뜸을 들였다. 그리하여 나는 생리불순이 오고 몇 날 며칠을 닭들에게 쫓기거나 닭을 잃어버리거나 닭장을 짓는 꿈을 꾸며 잠을 설쳤다. 드디어 남편이 거금을 들여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조립식 닭장을 인터넷으로 결제한 그날, 나의 신체리듬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맙게도 부지런해진 남편은 닭장을 잘 조립하고 관리했다. 땡볕에서 되지도 않는 호미질로 닭장 놓을 테두리를 열심히 파 놓았더니 남편이 괭이질로 각을 잡아주었다. 조립한 닭장이 자리를 차지한 후에 행여나 들쥐나 두더지 같은 야생동물이 파헤칠까 봐 작은 돌들을 잔뜩 모아 와 닭장 테두리를 보초 서게 했다. 주말에는 꼬꼬들 사료와 물을 직접 챙기고 아침저녁으로 닭장 문도 본인이 닫겠다며 굳이 나섰다.


계절마다 해 줘야 하는 관리도 엄청난데 거의 매주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여름에는 서향의 햇빛에 닭들이 너무 더울 것 같다고 하니 사이즈에 맞춰 차양발을 주문해 달아 주었다. 장마철엔 닭장 안으로 비가 들이칠 것 같다고 하니 큰 장막 비닐로 옆면과 뒷면을 가려 주었다. 심지어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을에는 내 작은 텃밭을 꼬꼬들이 침범하자 닭장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도 우리에겐 경관을 꼬꼬들에겐 넓은 운동장을 보장하는 설계를 바탕으로. 겨울에는 몇 날 며칠 방한 작업에 대해 연구하더니 4단계 방한 시스템으로 닭장을 보호했다. 가장 안쪽에 종이박스를 대고 그다음엔 스티로폼, 가구 보호용 포장재, 그리고 두꺼운 비닐 장막 순이다. 닭장의 앞면은 햇빛을 충분히 받기 위해 고급 방한용 뽁뽁이로 각 프레임마다 사이즈를 딱 맞춰 부착했다.


주말을 온전히 바쳐서 보수 작업을 하는 날이 여러 번이었다. 남편의 정성 어린 유지보수작업 덕분에 우리 꼬꼬들은 아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일은 내가 저지르고 뒷감당은 남편에게 미뤄두는 성미는 또 못 되어서 나 또한 그 작업들을 옆에서 같이 도왔다. 남편이 치수를 잰다고 하면 나는 반대쪽 끝에서 줄자를 잡았다. 스티로폼을 치수에 맞게 자른다고 하면 나는 자르기 쉽게 기준 막대를 잡았다. 뽁뽁이를 닭장에 붙인다고 하면 나는 박스테이프를 뜯어 옆에서 대기했다. 남편이 울타리를 치면 원두커피를 적당히 갈아 핸드드립으로 내리고 얼음 몇 개 동동 띄워 잠깐의 휴식을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첫 공통 취미가 생겼다.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 공통의 관심사나 취미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권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었지만 그동안 딱히 그럴만한 것이 없었다. 남편의 취미는 바둑과 온라인 쇼핑이다. 거의 매일 온라인으로 대국을 하기도 하고 유튜브로 대국 해설을 본다. 다행인 건 본인이 대국을 하다가도 아이들이나 나와 같이 해야 할 일 있을 땐 과감히 기권패를 한다는 점이다. 남편은 자칭 타칭 쇼핑의 달인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믹서기가 필요하면 각종 커뮤니티와 유튜브, 기사, 리뷰 등을 섭렵한 후에 가성비를 비교 분석하여 최적의 제품을 구매한다. 물론 "가"성비를 너무 중시해서 가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쇼핑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참 고마운 작업을 대신해 준다.


어쨌든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바둑이나 온라인 쇼핑을 좋아하지 않고 남편이 대학생 때부터 즐겨 한 스쿠버 다이빙이나 스노 보드도 무서워서 안 한다. 아이들과 집안일을 제외하면 딱히 공통의 관심사라고 할 것이 없을 만하다.


그런데 닭장의 고민을 함께 해결해 나가면서 우리 부부의 공통 관심사가 된 것이다. 주말이면 우리의 두 딸들은 2층에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즐기고, 우리 부부는 마당으로 가서 닭들 사료와 물을 챙긴다. 또 닭들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해설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갓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손에 한 잔씩 들고 있자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닭 키우는 것이 우리 부부의 취미가 되었다.



어느 날은 남편이 혼자 닭 멍을 즐기기도 한다. 집 거실 창에서 밖을 보면 탁 트인 들판과 3중으로 겹쳐있는 산, 그리고 넓은 하늘이 보이는 나름 뷰 맛집이다. 그런데 남편이 갓 내린 원두커피를 들고 캠핑의자를 탁 내려놓은 방향은 꽉 막힌 뒷산과 닭장 뷰다. 커피 향과 함께 닭 멍을 즐기는 것이다. 서울 사는 언니네가 오면 이 좋은 경치에 찌릿한 닭장 냄새가 난다고 언제 정리할 거냐고 성화인 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매우 평온하게.


늦잠 자기 바쁜 주말에도, 영하 10도인 추운 날에도 남편은 잠옷 위에 패딩 하나 걸치고 닭들에게 뜨끈한 물과 사료를 주러 나간다. 혼자서라도 닭장 맞은편에 캠핑 의자 갖다 놓고 최소 30분은 멍 때리다 들어온다. 그래서 어느 날은 내가 물었다.


당신도 닭을 사랑하게 됐구나?

그랬더니 1초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 가히 놀랍다.


아니, 너를 사랑하는 거야.


어머나.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새삼 놀란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몇 명의 엄마들이 모였을 때 자랑삼아했더랬다. 다들 내가 "'당신도 닭을 사랑하게 됐구나.'라고 했는데 남편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했을 때 "마지못해 한대?", "네가 안 하니까 한대?", "키워보니까 괜찮대?" 등의 말들을 했다. 그리고 "'아니, 너를 사랑하는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하니까 약 5초간 정적이 흐른 후 괜히 손사래를 치며 난리법석이 펼쳐졌다. 닭살이라며 웃으면서도 찌푸리는 괴이한 표정들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들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나는 그날에 있었던 일을 브리핑한다. 먼저 아이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그다음엔 요즘 새롭게 시작된 큐티(암탉)와 별리(수탉)의 밀당 이야기를 한다. 닭을 키우고 닭에 대해 대화하고 닭 키우는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취미가 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즐거운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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