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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두두 Feb 22. 2022

미안해. 널 보낼게.

수탉과의 정해진 이별

수컷이 많아도 잘만 지내면 계속 키울 생각이었다. 뒤늦게 아들복이 터져 부화한 10마리 중 6마리가 수컷이었다. 알을 안 낳아도 뭐 어때. 어차피 달걀 얻어먹으려고 키우는 거였으면 이미 손절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부화시키고 키운 지 이제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현재 알을 낳는 암컷은 단 한 마리다. 그래서 그 비싼 달걀을 마트에서 꾸준히 사 먹는다. 그렇다고 신세 한탄을 하거나 닭을 왜 키우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전혀 없다. 그냥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해 주면 그걸로 됐다. 한가로이 노는 모습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힐링이 닭들이 내게 주는 대가다.


하지만 수탉들과는 예정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아무것도 모르고 반려 닭으로 키우겠다 마음먹은 적도 있지만 성별의 중요성은 너무 크다. 가축의 한계다.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명이다. 사실은 암탉을 키우고 싶었던 성차별의 표출이다. 이제까지 4~5개월령이 되는 수탉 4마리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수탉을 보내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자유분방한 목청 때문이다. 수탉은 3개월령쯤 되면 목청껏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 정도의 부화 텀이 있어서 서열관계가 확실하다. 일인자만이 제대로 진짜 제 목소리를 내어 과시한다. 보란 듯이 질러대는 그 목소리가 너무 크고 우렁차서 나의 예민한 청각기관을 제대로 공격한다. 


특히 몸짓도 확실히 큰 토종 수탉은 목소리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너무 크다. 도시 사람이 조용한 마을에 이사 와서 눈치 보고 있는데, 이 수탉이 "여기 나도 있어요~"하고 하루 종일 존재감을 과시하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나 혼자 애가 탔다. 정말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너무 하루 종일 울어댔다. 암탉의 수가 적어서 욕구불만을 표출하는 것인가, 사료가 부족해서인가, 뒷산으로 날아든 까마귀에 놀라서인가. 다양한 이유를 추리해 보지만 일인자 수탉은 그냥 계속 울어댔다. 닭은 사랑하는 지인은 '노래를 좋아한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몇 시간을 관찰해 본 결과 '쟤는 진짜 그냥 우는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수탉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주인도 못 알아보는 공격성 때문이다. 첫 번째 일인자였던 토종 수탉 몽이를 다른 곳으로 보낸 뒤 그 자리를 차지한 2세대 청계 수탉이 선배의 면모를 그대로 재연했다. 우리 집의 닭 키우는 환경이 잘못되었는가를 의심할 정도로 하루 종일 울어댔고 주인을 공격했다. 자기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잡혀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예감을 한 것인지, 그렇게 선배의 복수를 해댔다. 사료를 주러 들어가도 거침없이 나를 공격했고, 울타리 밖을 나와 마당에 놀고 있던 아이들을 공격했다. 손등에 닭이 쪼아 피가 난 상처가 세 번째 생기자 닭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보냈다.


수탉과 이별한 세 번째 이유는 결국 암탉을 위해서다. 닭을 키우는 전문가분들의 의견으로는 암탉과 수탉의 비율은 최소 6:1에서 15:1 이더라. 수탉의 욕구를 감당하려면 암탉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일부다처제다. 암탉의 수가 너무 적으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암탉 위에 올라타 등에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하고 피를 보기도 한단다. 암탉이 너무 힘들면 수탉을 피해 횃대 위에 올라가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버티다가 끝내 잃기도 한다더라. 암탉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계하고 누구 한 마리가 올라타면 득달같이 달려가 어퍼컷을 날린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그 사이에서 암탉이 놀라 나뒹군다. 



4개월령만 되어도 수탉들은 제 역할을 하려고 한다. 신사처럼 식사 매너를 보이기도 하지만 거침없이 자기 욕구를 채우기도 한다. '쯧쯧, 수컷들이란...' 말이 또 어김없이 나오게 된다. 같이 한날에 태어난 형제들 사이에서는 권력다툼도 일어난다. 병아리 시절에도 틈만 나면 목 주변의 깃을 가시처럼 세워 눈싸움을 하던 녀석들이 3개월령쯤 되면 누가 일인자인지 확실히 판가름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자는 끊임없이 일인자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린다. 비등비등해 보이면 계속해서 돌림노래를 부르며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를 겨룬다. 매우 시끄럽고 공격적이다. 제 역할을 하는 수탉들이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예정이 되어 있는 이별은 슬픔도 덜 하다. 아마도 나는 두 번째 부화 때부터 수탉에 대한 정을 깊게 가지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는 보내야 할 존재로 미리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료는 마음껏 먹게 주었지만 정은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곳에 보낼 때도 그저 더 오래 생을 즐기도록 키워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만 인사로 대신했다. 


더 이상 부화는 시키지 않기로 했다. 가축이라고 하기엔 애정이 들었고, 반려 닭이라고 하기엔 성별에 따라 차별했다는 죄책감이 생겼다. 아직도 암탉과 수탉의 비율이 3:2여서 어쩌면 2~3개월 내에 또 한 마리의 수탉에게 '미안해. 널 보낼게.' 해야 할 것이다. 나름대로의 평화가 유지될 때까지 나름대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름대로 누리도록 하다 적당한 때에 이별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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