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장생활의 첫 장, B 브랜드.
그저 옷이 좋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주 작은 브랜드의 샵 매니저가 되어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1도 하지 않았던 젊음의 패기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하지 못할 경험이란 걸 알기에 스스로가 기특하기도 하다.
항해하다 키를 잘못 돌렸는데 개고생 끝에 우연히 보물섬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도움은 안 되는 커리어지만 이제껏 무난하고 평범하던 내 인생에서 진귀한 구경을 제일 많이 한 곳이기도 하니까.
B 브랜드를 그냥 ‘좋아하는 브랜드’라고 정의하기엔 어딘가 조금 잘못됐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를 실제로 보고 ‘잘 그렸네’라고 하는 건 어딘가 조금 잘못된 표현 같지 않은가. B 브랜드를 알게 된 후로 몇 년간 모은 돈이 없었고, 내 옷장의 모든 옷에 B 브랜드의 택이 달린 걸 감안하면 정상적인 열정은 아니었다.
솔직히 많이 미쳐있긴 했다.
엄청나게 사랑했고.
B 브랜드를 알게 해 준 건 대학 동창 도토리다.
도토리와 나는 옷을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취향도 조금 겹친다.
둘 다 화려하지 않고 실루엣이든 원단이든 밀도가 느껴지는 옷을 좋아한다.
디테일이 섬세해서 저렴한 SPA 브랜드 옆에 같이 두면 유독 4B연필로 진하게 그린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옷!
하지만 세상에 예쁜 브랜드는 차고 넘쳤고, 저마다 S/S, F/W 시즌을 쏟아내다 보니, 가득 찬 장바구니를 거르고 걸러 최선의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도토리와 나는 서로에게 장바구니 거름망 같은 사이가 되었다.
‘나 이거 살까?’라는 말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안부를 생략하고 사고 싶은 옷 링크만 달랑 보내곤 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뭐야? 좀 싸가지없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옷 고르기 바쁜 쇼퍼홀릭끼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링크를 받은 사람은 내 돈 쓴다 생각하고 진지하게 허불허를 해줘야 한다.
(1) 내 눈에도 예쁘구나. 사는 걸 허락한다. 허.
(2) 정말 이게 마음에 드니? 나라면 안 사겠다. 불허.
땅땅땅.
그때 도토리가 허락을 구한 옷이 바로 이 B 브랜드의 원피스가 되시겠다.
4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 원피스의 디자인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주 작은 도트 무늬가 수 놓인, 허리를 졸라매는 끈이 달린 군청색 반팔 원피스.
평범한 듯하면서도 실루엣이 예뻤고 청색 광택이 도는 네이비 컬러 원단이 독특했다.
한눈에 확 띄진 않지만 계속 보고 싶은 그런 디자인.
그리고 예상보다 많이 비쌌던 가격.
<질 좋은 옷을 오래 입자> 주의인 나의 판결은 1번, 허였지만 대학원생 도토리는 가격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포기했다.
도토리는 그 옷을 잊고 돈을 아꼈지만, 나는 그때부터 정신 나간 쇼핑을 시작했다.
오로지 B 브랜드의 옷만, 도토리의 허불허 없이 여유가 되는 대로 구매했다.
옷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옷 예쁘다’라는 말은 기분 좋은 칭찬이고, ‘어디서 샀느냐’는 질문은 최고의 찬사다. B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언제나 둘 중 하나는 건졌으니, 나에게 B 브랜드는 코디 치트키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날 이토록 끌려다니게 만드는 건 어떤 사람들일까?
그래서 그냥 냉큼 이력서를 보냈다.
B 브랜드의 안목을 선망한다는 찬사와 함께.
면접을 보러 갔던 한남동의 사무실은 빈티지한 가구들과 예쁜 주방이 있는, 마치 누군가의 다락방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큰 실장님의 멋진 안경과 작은 실장님의 소녀 같은 곱슬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 여자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예쁜 옷을 만들어내면, 매일이 크리스마스이브일 것 같은 환상이 생겼다. 그리고 한남동 출근이라니, 함께 지하철에 내리는 사람들조차도 스타일리시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웬걸,
내가 첫 출근을 할 때는 세련되지도 않고 핫하지도 않은 장충동 언덕 꼭대기의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난 뒤였다. 빠른 걸음으로 10분도 빠듯했던 한여름의 언덕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비록 크리스마스이브는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하는 일은 변함이 없었기에 나름의 즐거움이 소복하게 쌓였다.
매 시즌의 컨셉과 디자인을 미리 볼 수 있었고, 유럽에서 도착한 신기한 원단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길바닥에 고추를 말리고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동네에 인형 같은 외국인 모델들이 줄줄이 찾아와 피팅을 하고 가는 것도 신기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컨셉 사진을 만드는 것을 보며 ‘역시 디자이너는 다르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장 큰 복지이자 유일한 혜택은 어떤 제품이든 50% 할인된 가격에 품절 걱정 없이 찜해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기한 할부 입금이 가능했다. 참새에게 곡물 뷔페 같은 곳이었고 내 잔고는 순식간에 밑 빠진 독이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쇼핑 일기도 기록해 보려고 한다. 타고난 안목은 없지만 옷에 미쳤던 사람의 시행착오 과정과 깨달음의 기록 정도가 될 것 같다.)
제일 값진 경험은 무엇보다 작품이나 다름없는 컬렉션을 만들고 파는 과정에 함께한 것이다.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등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프로페셔널함을 엿볼 수 있었고, 각자의 분야에서 안목과 실력을 두루 갖춘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멋있었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본 후로 전문성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자, 좋은 기억은 여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퇴사길을 걷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아침마다 2층 창문을 열고 몰래몰래 사무실 마당으로 쓰레기를 던지던 옆집 할아버지가 있었다.
처음엔 쓰레기를 되돌려주며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치열하고 몰상식한 무언의 전투가 일상이 되어버리자 출근이 두려워졌다. 9시간만 근무하는 나는 24시간 상주하는 노인네를 이길 수 없었다.
둘째, 빨간 해병대 모자와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돌아다니며 시비를 걸던 시한폭탄 같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경고: 눈을 절대 마주치지 말 것.
내 눈앞에 없다면 땡큐지만 저 멀리 빨간 모자가 보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었다.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조차 없는 한적한 동네에서 이런 노인들과 9시간씩 틀어박혀 있다 보면 정신이 피폐해졌다.
셋째, 누군가의 ‘실장님’만 해봤을 뿐, 밑에서부터 직장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실장님들은 철이 없었다.
내 앞에서 둘이 별것도 아닌 걸로 다투다 서로 말을 안 하는 지경까지 간 건, 그래, 뭐 나름 귀여웠다. 인간적인 모습이었지. 그런데 (좋게 말해서) 철이 없는 행동이 나에게 향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샘플을 피팅하는 나를 보고 ‘촌년 같네’라고 한다거나 (실장님이 디자인한 옷이잖아요!), 자기 집으로 새 과자를 잔뜩 주문한 다음 날, 집에 묵혀뒀던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들을 가져와서 먹으라고 준다거나,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사춘기 청소년스러운 말투 같은 것.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은 없었다.
치를 떨고 분개할 만한 큰일은 없었지만, 이런 것들이 매일 반복되면서 마음을 물러터지게 만들었다.
넷째,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라고 쓰고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읽겠다.)
계속 여기에 있으면 나는 세 번의 동작만으로 박스를 접는 포장 경력자로 성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돋보기를 끼지 않고도 블라우스의 잡사를 찾아내는 검품 전문가가 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브랜드로 가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 건가?
그 어떤 결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가 네 가지나 쌓이니까 더 이상 일이 즐겁지 않은 순간이 와버렸다.
단 하루도 더 버티기가 힘들었고 코앞에 놓인 퇴직금보다 나의 정신건강을 회복시키는 게 더 중요한 지경이 되었다. 이러다 실장님들이랑 맞짱 뜨겠다 싶은 경계선에 다다랐을 때, 장충동의 중심에서 퇴사를 외쳤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취준하지 왜 여기 들어와서 시간 낭비했냐‘는 말로 얻어맞았다. (제 맘이거든요!)
B 브랜드에서의 직장 생활은 장단점이 명확했다. 실장님들을 직장 상사로서 대하면 상처받고 실망할 일들이 많았지만, 반대로 사적으로 보면 애교도 많고 정도 많았다. 실장님으로서가 아니라 언니, 동생 사이로 만났다면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이라고 느꼈을 것 같다.
어쨌든 멀리서 보면 긍정적이었다.
네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도 계속 B 브랜드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뭐, 이젠 직원 혜택이 없어서 시즌오프 때만 한 벌 살까 말까 하지만.
새로운 컬렉션이 나오기까지 어떤 시행착오들과 수고로움이 있으며, 어떤 한계가 있을지 이제는 상상할 수가 있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새 시즌을 기다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멋진 룩북이 짜잔! 하고 나오면 온 마음으로 감탄과 응원을 보낸다.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