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다다르지 못한 사람 같았다.
어딘가 어설프고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
그런 의미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 걸까?
‘나는 왜 특별하지 않고, 왜 늘 선택받지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초등학교 체육시간, 피구 팀을 짜던 장면이 떠오른다.
흑역사라기보다는 어린 날의 내가 조금 가엾게 느껴지는 기억이다. 각 팀에서 대표 두 명이 나와 친구들의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활발하거나 친한 아이들의 이름이 먼저 불렸고,
선택받은 아이들은 ‘나이스!’, ‘오예~!’를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얼굴엔 의기양양한 웃음이 번졌다.
나는 그 모습을 부러워할 새도 없이, 그저 ‘빨리 체육시간이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어른의 눈에는 어색함이 고스란히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은 건 나였다.
조용히 인원이 모자란 팀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라리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편이 덜 창피했을지도.
어릴 적 나는 늘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게 서운하면서도 조금은 창피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곧 미움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단지 나와 그들의 결이 달랐던 게 아닐까?
팀을 꾸리던 아이들은 주도적이고 활발했다.
자연스레 자신과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친구들을 먼저 불렀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자신과 닮은 속도, 비슷한 감정 온도, 비슷한 표현 방식에 이끌리는 법이니까.
그땐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같은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서운했고, 마음에 작은 상처가 남았다.
시간이 흘러도 비슷한 장면은 이어졌다.
모임 속에서도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속으로 묻곤 했다.
“역시 나는 특별하지 않은 걸까.”
그 질문이 무겁게 다가올 땐, 자존감을 북돋우는 영상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늘 같은 메시지가 들려왔다.
“우리는 모두 특별합니다.”
위로의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위로는커녕 오히려 반감이 들기도 했다.
“모두 특별하다고? 아니. 모두가 특별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선택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함은 누군가에게 선택되거나 기억될 때 만들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 위에도 설 수 없고,
기억 속에도 남지 못한 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렇게 느꼈다.
“나는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우리에겐 이미 ‘고유함’이 있다는 것을.
고유함은,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는 작은 차이다.
특별하지 않다고 해서 흔한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도넛 가게에서 초코도넛을 고를 때도 그렇다.
진열대 위 초콜릿 도넛은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막상 집으려면 꽤 오래 고민하게 된다.
어떤 건 초콜릿 필링이 더 빵빵해 보이고,
또 어떤 건 초코코팅이 벗겨지지 않아 표면이 매끄럽고 깔끔하다.
우리는 그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
선물할 곰인형을 고를 때도 그렇다.
전부 같은 제품인데도 어떤 인형은 눈이 살짝 몰려있고, 어떤 인형은 코의 실밥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누군가는 ‘그래서’ 고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래서’ 선택할 수도 있다.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간 순간이, 나에겐 오래 남을 수 있다.
상대는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웃는 타이밍, 화를 내는 방식, 좋아하는 말투, 듣기 싫은 단어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지만 모두 나만의 결이다.
세상이 나를 특별하게 보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내 고유함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을까.
특별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유일하다.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낸다는 건
그 자체로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뜻이니까.
그러니 당신이 스스로를 너무 쉽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 하루,
당신의 고유함이 조금 더 존중받는 하루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