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atchTal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zetto Nov 12. 2021

감각을 입힌 장엄하고 웅장한 서사  : 세계관의 시작

평촌 CGV. 듄.

예고편에서부터 거대하고 장엄한 사막이 눈길을 끄는 영화가 개봉했다. 1965년 프랭크 허버트라는 작가가 창작했으며 판타지 소설의 경전이라 불리는 <반지의 제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텍스트. <듄>이다. 약 1만 6000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 원작 소설이 1984년 영화화 된 이후 리부트되어 올해 2021년에 개봉했다. 원작 팬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었을 것이며 굉장히 오랜만에 나온 거대 판타지 시리즈 영화이기에 영화팬들에게도 기대되는 소식이다.


하지만 개봉한 영화의 평을 살펴보면 호불호가 강하다. 보통 판타지 시리즈 영화의 1편은 세계관을 설명하면서 주인공이 극복해야 하는 고난을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데 <듄>은 세계관 설명만이 아니라 온통 사막밖에 없는 황량한 행성 아라키스를 재현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만 6000년의 시간 중 아주 일부의 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약 설명해야 하는 영역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서사 전개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세계관과 설정에 아라키스의 거대한 사막을 함께 재현하다 보니 서사 전개는 더 느려진다. 총 2시간 35분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어떻게 보면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로 보이기까지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거대하면서 화려한 우주 활극이 아닌 우주 속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영화 <듄>. 왜 이렇게 만든 것일까?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는 <듄>에서 인류 역사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인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한다. 단, 프랭크 허버트가 말하고자 한 초인에 대한 경계는 초인 그 자체에 대한 경계이면서 초인을 신격화 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계이다.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이 등장한 초인들은 한 번씩 역사의 분기점을 만들고 사라졌다.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히틀러 등. 그런데 이들 초인은 단순히 자신이 잘난 것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초인의 능력도 문제지만 초인은 추종자들에 의해 신격화되고 결국 초인은 인간이 아닌 신으로서 세계의 질서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작의 주제의식은 보통 초인인 주인공이 다른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지님과 동시에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초인의 이상을 조금씩 왜곡하고 결국 세계에 혼란을 가져다 주는 서사로 표현된다. 사실상 일반적인 영웅 서사와 비슷하지만 이미 비극이라는 점이 내재한 서사인 것이다. 이렇듯 비극을 내재한 초인 서사 전개에서 초인과 추종자 혹은 초인과 일반인들 사이에는 육체적으로든 인식적으로든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간극을 메울 수 없기에 초인은 초인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며 일반인들은 초인을 신의 지위에서 끌어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후 나올 영화 <듄> 시리즈도 원작의 주제의식을 최대한 재현했으며 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듄>의 서사 자체는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데스가 아버지인 레토 공작을 살해한 하코넨 가문에 복수하고 아라키스 행성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향후 나올 영화 시리즈도 1편의 간단한 요약처럼 폴 아트레이데스가 성장하고 결국 하코넨 가문에 복수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아가 언급한 주제의식이 재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복수의 과정에서 모든 인간을 발밑에 놓을 정도의 초인으로서 능력을 갖춘 폴과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기는 아라키스 행성의 원주민 프레멘들 혹은 폴과 다른 인물들 간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영화에서는 표현될 것이다.


실제로 폴은 다른 인물들과 능력 면에서 이미 초인이다. 인류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비 단체 베네 게세리트 출신의 어머니로 인해 신체 능력, 예언 능력, 언령(言霊)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메시아의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하는 베네 게세리트만의 시험인 곰 자바를 통과하기도 했다. 이를 이용해 아라키스 행성에 베네 게세리트는 아라키스의 신화와 연결해 폴이 프레멘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라는 점을 강조한다. 폴에게 능력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까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인들이 폴을 메시아라 여기기 때문에 혹은 예언 능력이나 언령과 같은 초능력을 폴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폴이 초인인 것이 아니다. 스스로 초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폴은 역설적이게도 그 태도에서부터 초인이라는 모순을 갖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무서워 최대한 그 영향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갖는 모습은 사실 폴의 초인성을 더 극대화 한다.


이러한 폴의 두려움은 영화 초반 자신의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폴의 두려움은 단순히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거나 중압감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이미 폴 자신이 잘났건 못났건 간에 스스로를 경계할 줄 알고 있으며 이러한 경계를 어떤 순간에도 절대 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영화의 시작부터 보여주는 것이다. 즉, 폴은 외연적으로 능력을 배우고 얻었으며 타인들에게 초인으로 인정받을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재적으로도 그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보이지 않으려 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며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경계한다는 점에서 이미 초인 혹은 초인으로서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스스로를 경계하는 폴의 모습은 폴이 영화의 다른 인물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반증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배경인 아라키스의 사막과도 조응한다. 아라키스의 사막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맨몸으로 살아남기에는 절대 불가능한 자연의 영역이다. <듄>에서 사막 행성 아라키스는 아트레이더스 가문의 모행성이자 물의 행성인 칼라단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물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막 행성에 물의 행성에서 메시아가 온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듄>은 물의 메시아가 사막 행성에서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깨달아 사막을 천국으로 바꾸게 되는, 평범한 영웅 서사 판타지 텍스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초인에 대한 경계가 주제의식인 <듄>은 아라키스 행성에서 아트레이데스 가문을 몰락시켜 물과 사막의 이미지를 완전히 전복시킨다. 온갖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물은 찾아볼 수 없는 사막에서 물의 메시아는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되고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물은 사막을 천국으로 바꿀 수도 있지만 사막에 흡수되어 무의미한 습기가 될 수도 있다.

사막에서 폴은 물의 이미지를 통해 초인으로 각성한 것이 아니라 사막의 '스파이스'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경계하는 초인으로 각성한다. 물이라는 이미지는 사막에 전복됐지만 폴에게 내재한 초인성이 사막이라는 공간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는 곧 폴이 물의 메시아라서가 아니라 자신과 조응하는 사막에서 메시아 그 자체로서 사막의 아라키스를 천국으로 탈바꿈할 것을 의미한다. 사막은 초인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고난이자 장애물인 것만이 아니라 초인이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며 온갖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때로는 경이로울 정도로 장대하고 웅장해 아름답다는 말 이상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막. 자신의 능력을 경계하고 심지어는 미래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하지만 경이로운 능력과 모든 이의 맹목적인 추종을 받는 초인-폴. 영화에서 아라키스의 사막을 단순히 모래의 바다라는 시각적 요소만이 아니라 온도나 습도와 같은 촉각적 요소, 거대한 괴수 샌드웜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에 가까운 경외감, 한스 짐머의 장중한 음악에서 느껴지는 청각적 무게감 등으로 표현해 관객이 감각의 총체로 부지불식간에 사막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초인-폴과 사막이 조응하기 때문이다. 신이 될 초인은 세상 그 자체로서 어디에서나 느껴질 것이며 그 감각은 사막과 같이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듄>은 주제의식과 주제의식의 감성적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화려한 우주 활극과는 정반대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느리면 느릴수록, 웅장하면 웅장할수록 폴의 초인성이 극대화 되고 극대화 된 초인성에서 주제의식이 꽃 피우게 된다. <듄>은 다큐멘터리처럼 느리고 무거우면서도 시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느껴야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의 영화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극대화 된 초인성이 오히려 관객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극 중 프레멘처럼 관객에게 초인에 대한 일종의 신격화 경향 혹은 초인을 희구하는 경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화는 초인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관객에게는 프레멘과 같은 초인 희구와 신격화라는 경향이 나타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밌는 모순일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시리즈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원작과는 다른 영화만의 차이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는 앞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다. 감성을 통해 이성으로 이해하는 서사를 전달하는 영화 <듄>. 호불호가 갈리는 것과 별개로 시리즈의 결말이 기대되는 영화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의 발이 되고자 하노라 : 하늘로 향하는 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